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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386의원들은 들으시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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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최근 외교.경제정책을 놓고 '노무현 탄핵'신드롬으로 역사상 가장 극적으로 국회에 진출한 '386세대 출신 의원'들 사이에 노선 차이를 보이는 것으로 알려졌다. 나라가 발전하고 편안해지려면 이들이 순조롭게 대한민국 체제에 신탁(信託) 순치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대한민국 창조적 발전의 한 동력원으로 성장 수렴되어야 한다.

*** 강대국 틈새 51년간 평화

그러기 위하여 이들에게 공통된 몇 가지 함몰된 역사인식을 보충하고자 한다. 첫째, 대한민국은 황해.동해지역(東北亞)에서 유일한 민주공화국이라는 사실을 깊이 반추하기 바란다. 일본은 천황제 왕국, 중국은 공산당 1당 독재 국가, 북한은 두 세기(20~21세기)에 걸친 부자세습의 세계 최악의 폐쇄국가다. 국가의 원수도 국민이 민주적 절차로 뽑은 것이 아니라 세습 천황, 당(黨)주석, 국방위원장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

지금 한국에서 누리고 있는 자유가 북한.중국과는 비교할 수 없고 심지어 일본이나 스위스.영국보다 얼마나 크고 넓은 자유인지를 실체적으로 교량(較量)하기 바란다. 비정부기구(NGO), 지방자치, 대학문화, 경찰관.교도관.버스운전사 때리기 죽이기…, 간첩까지 민주투사 되는 자유.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유일한 자유 아닐까. 노무현 대통령의 등장이 가능케 한 자유.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깨달아야 한다.

둘째, 1953년 휴전 이후 오늘까지 51년의 평화. 51년 동안 이 한반도에서 전쟁이 없었다는 사실은 서세동점(西勢東漸) 근대 전개 이래 가장 긴 평화기간이다. 1876년 개항 이후 청일전쟁(1894~95), 노일전쟁(1904~05), 1910년의 국권상실, 제2차 세계대전(1936~45), 한국전쟁(1950~53)까지 우리는 한 세대도 평화기간을 누린 적이 없다.

이제 앞으로 9년 뒤 2013년까지 전쟁이 없다면 한반도는 근대 이후 처음으로 1894~1953년의 60년 전쟁 점철 기간보다 긴 2세대 이상의 평화기간을 맞는 셈이다. 이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종합 국력으로 1, 2, 3, 4등 하는 미국.일본.중국.러시아와 인접해 사는 한민족으로서 19세기 이래 겪은 아픈 근대화 과정이 평화.복지로 결실될 수 있기 위하여는 또 하나의 독립운동, 전쟁하는 정력으로 '평화를 지킬 힘'을 키워야 한다.

셋째, 이 나라 경제성장 과정에 흠집이 많았다. 그러나 1957년까지의 전후 복구를 거친 뒤 58년부터 시동을 건 근대 경제성장의 성공이 결정적으로 '한국혁명'의 시발점이 되었다는 사실을 평가해야 한다. 엽전의식, 사대패배주의에 젖은 한국인들에게 근대 경제성장의 성공이 교육열의 선순환과 민주화를 가속시켜 2차대전 후 독립한 나라 중 정치민주화.경제성장.교육과학기술에 성공한 근대혁명의 모범국이 되었다.

특별히 각성시키고 싶은 점은 한국의 경제성장은 진짜 '무(無)'에서 출발했다는 것이다. 일본은 나가사키(長崎)를 통하여 16세기 이래 서양근대에 창을 열고 있었고 전전 식민지 지배를 통한 약탈적 자본축적이 있었다. 대만.홍콩.싱가포르의 경제성장 시발이 미국.유럽.동남아에서 성공한 화교 기술 자본 시장의 알선에 의한 것이었고, 오늘날 경제대국으로 성장한 중국의 입세(入世)도 초기 외자의 80~90%가 화교의 것이었다.

이들과 비교하면 한국의 초기 성장동력은 미국의 민생적 원조를 빼고는 완전한 '무'에서 출발한 자주적 노력이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화교 같은 동족자본이나 식민자본 축적 같은 외생적 공급보다 강한 자립의지의 산물이었다는 점에 자부심을 가져도 좋다. 그 과정에서 이승만.박정희 같은 자주적 창조자들보다는 그 후임자들과 주변 권력자들의 부패와 안일과 반동과 망자존대가 오늘의 역풍을 자초한 것이다.

*** 역풍과 반동 불러오지 않기를

386의원들이 동북아의 유일한 공화국, 4강에 둘러싸여 있으면서 유지하는 51년간의 평화, 그리고 화교나 약탈자본이 없는 자주적 근대 경제성장의 어려움의 가치와 의미를 깊이 반추해주기 바란다. 이 성취는 우리가 가꾸기에 따라서는 동북아를 넘어 세계문명사적 업적이 될 수 있다.

제발 감정적 이상주의와 교활한 실용주의로 개혁을 농단하여 한국혁명의 기초를 튼튼히 하기 위한 진짜 개혁에 역풍과 반동을 불러오지 않기 바란다.

이 땅에 사는 우리의 기본명제가 풍요나 번영이나 재미가 아니라 여전히 생존과 안전이며, 51년간 유지된 평화를 정착시키며 동북아의 유일한 민주공화국, 근대성장을 성취한 실체를 소중히 보존, 발전시켜야 한다.

김진현 전 서울시립대 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