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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민주노동당에 거는 기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희생자의 10배 이상의 노동자가 80년 이후 산업재해로 숨졌고, 40대 사무직 노동자의 과로로 인한 사망률이 세계 1, 2위를 다투고 있다.

IMF 경제위기 이후 1백50만명 이상이 하루아침에 거리로 내몰리고, 전 노동력의 과반수가 임시직.일용직 등 불완전 취업상황에 놓이게 됐다.

그런데도 당사자들을 제외한 우리 사회는 덤덤하기만 하다. 그저 내 가족, 내 자식이 노동자가 아니면 '다행' 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 사회의 막대한 사교육비 투자, 자신의 지위를 과시하려는 졸부들의 과시적 소비, 온 학부모들을 열병에 사로잡히게 만드는 입시경쟁은 모두 '노동자와 거리를 두려는 전쟁' 으로 볼 수도 있다.

비슷한 경제력을 가진 나라 중 사회복지 예산이 가장 적고, 빈자(貧者)와 약자들이 어려움에 처하면 오직 개인적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는 한국 사회의 현실은 '노동자의 사회적 결집력의 결여' 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민주노총이 주도하는 민주노동당이 지난달 30일 공식 출범했다. 창당대회에서 민주노동당은 고질적인 정치부패와 지역주의를 극복하고, 패거리 문화와 하향식 공천을 극복한다는 기치를 내걸었다.

그들의 목소리는 자기쇄신의 능력을 상실한 기성정치에 지친 우리들에게 자그마한 기대를 불러일으켜준다.

민주노동당 세력은 이미 지난해 울산에서 구청장을 당선시켜 장차 노동자 밀집지역에서 몇 석을 얻을 수 있으리라는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

더구나 민주노동당은 50년대 이후 실패를 거듭했던 진보정당과 달리 민주노총의 조직적인 뒷받침을 받고 있기 때문에 우리 정치사를 바꾸는 한 돌파구가 되지 않을까 하는 희망도 갖게 해준다.

총선시민연대의 부패정치인 갈아치우기 운동이 이토록 큰 힘을 받고 있는 마당에, 그 물줄기를 대안세력 찾기 운동으로 연결시킬 수 있다면 의외의 선전도 기대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유럽 여러 나라의 경험이 보여주듯 노동자정당 혹은 진보정당이 온전히 서지 않는 나라에서 사회적 형평성과 연대, 높은 삶의 질, 정책정당의 등장은 거의 기대하기 어렵다.

노동자의 정치적 성장은 노동자뿐만 아니라 여성.장애인.노인 등 사회적 소수자의 권익 향상에도 기여하게 될 것이다. '정의' 는 구호가 아니라 세력의 균형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러나 민주노동당의 앞길에는 첩첩산중이 가로막고 있다. 소비에트 사회주의가 실패하고 사회민주주의도 위기에 처한 마당에 이들이 주창하는 경제개혁 방안이나 통일방안이 위험한 것은 아닌지, 그리고 과연 성공할 수 있을지 우려하는 시선은 여전히 강력하다.

기성정당은 이들의 진입을 막으려 하고 있으며, 재계는 "너희들이 정치를 하면 우리도 돈의 힘을 발휘하겠다" 고 맞대응하고 있다.

이른바 386세대들은 '진보정당 시기상조론' 을 내세우며 기성정치의 '수혈' 에 동참하자고 권유한다. 또 일반국민은 과거와 다름없이 노동자가 무슨 정치를 할 수 있느냐고 생각하고 있다.

정책부재와 이념부재의 정치, 패거리 정치와 지역정치를 틈만 나면 비판하는 상당수 지식인과 언론도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 고 말하기를 꺼린다.

그러나 가장 큰 장벽은 내부에 있다. 오늘 1천3백만명에 달하는 피고용자 중 자신이 노동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직 소수에 불과하고, 사무직 노동자들은 주식투자와 벤처열기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이번 총선에서 민주노동당이 몇 석을 얻는다고 해서 한국 정치나 사회가 금방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민주노동당의 '실험' 이 과거 진보정당의 전철을 밟아 또 한번의 에피소드로 끝날 경우 기성 정치세력은 과거에 그랬듯이 또다시 개혁의 '시늉' 만 하게 될 것이고, 노동자는 더욱 더 '시장의 회초리' 에 자신을 내맡기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며, 부자와 빈자간의 사회적 양극화는 더욱 심화될 가능성이 크다.

김동춘 <성공회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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