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새로운 예술'과 그 수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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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유럽에서도 나라에 따라 새로운 예술을 받아들이는 데는 차이가 있는 듯하다.

가령 '현대의 고전' 스트라빈스키의 오페라 "탕아의 편력" 이 1960년대 초 서베를린에서 공연됐을 때 관객들의 한결같은 갈채를 받는 걸 보았다.

그러나 몇해 뒤 빈의 국립오페라에서는 같은 작품에 대해 일부 관객이 "부우!" 하고 야유의 고함소리를 지른 걸 보고 놀란 일이 있다.

빈의 청중만이 아니다.

무릇 사람의 귀란 그 본성이 보수적이란 설명도 있다.

우리는 귀에 익은 가락을 즐겨 듣는다.

낯선 음악, 특히 현대의 전위음악에 청중이 등을 돌리는 것은 비단 그 소리가 귀에 생소할 뿐만 아니라 여태까지 자명한 것으로 전제됐던 조성(調性)과 같은 음악의 기본질서조차 파괴돼 버렸기 때문이다.

사실 유럽의 문화도시에서도 현대음악을 이해하거나 이해하고자 하는 수용자들은 많지 않다.

슈토크하우젠.케이지.노노.제나키스.윤이상 등의 작품을 발표하는 음악회는 수백석의 작은 홀도 많이 비는 것이 예사다.

들어도 알 수 없고 하물며 들어서 즐겁지도 않은 음악회에 표를 사서 들어오는 청중이란 극히 제한돼 있다.

그래서 현대음악의 작곡과 발표를 돕기 위해선 입장권 매매와 상관없는 라디오 방송사가 후원자로 나서는 것이 관례가 되고 있다.

지난 주말 장충단 국립극장에서는 문화관광부가 정한 '새로운 예술의 해' 를 여는 개막공연이 있었다.

멀티미디어의 조작으로 대극장과 소극장을 연결해 음악.춤.마임 등을 공연하는 현장과 영상을 동시에 보여주는 이른바 '인터랙티브.네트워크 아트' , 또는 컴퓨터의 센서를 이용한 디지털 음향장치를 통해 관객들의 소리들을 합성했다는 '음성혼합합창곡' 등이 이날 '새로운 형식의 예술' 로 선보였다.

그에 대한 관객들의 반응은 회의적이자(당연하지…) 동시에 호의적인 것 같았다(장한 일이지!)

새로운 예술의 실험에 일반 관객이 회의적 내지는 부정적 반응을 보인다는 것은 놀랄 것이 없다.

그건 세계 어디서나 마찬가지이고 그런 현장을 나는 수없이 보아왔다.

유럽에선 그럴 경우 거부반응을 직접 행동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부우!' 하고 야유를 하고 큰 소리로 홍소(哄笑)하거나 자리를 차고 퇴장해버리는 행동이 그것이다.

하긴 그런 거부반응조차 거두지 못한다면야 새로운 예술, 전위예술이란 것도 없을지 모르지…. 장충단의 개막공연에 대한 회의적 반응에는 물론 또 다른 생각도 없지 않은 듯했다.

새로운 예술이 단순히 멀티미디어의 '기술적' 가능성만 보여줄 뿐 그같은 테크놀로지.유포리아(기술도취)를 넘어서 어떤 '예술적' 메시지를 전달한 것은 없지 않으냐 하는 아쉬움이 그것이다.

그러나 장충단에서 선보인 것은 '새로운 예술' 의 겨우 서곡이고 그 일부일 뿐 전부는 아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객의 일반적인 반응은 호의적인 것 같았다.

극장을 메운 관객의 수와 공연을 '묵살' 해버리지 않고 그를 문제삼으려는 공연후의 담론 등 그걸 읽을 수 있었다.

어떤 면에서는 새로운 예술에 대해 한국의 일반시민이 마음을 열게 한데는 백남준의 존재가 절대적 기여를 했다고 할 수 있다.

나는 세계 어느 도시에서도 존 케이지나 머스 커닝엄의 공연에 한국처럼 많은 관객이 몰려든 걸 본 일이 없다.

새로운 것, 소문난 것이라면 아무거나 가리지 않고 덤벼드는 한국인의 부대찌개식 잡식성의 건담(健啖)이라고나 할 것인지…. 새로운 예술의 진흥을 위해선 나쁠 것 없는 토양이라 생각된다.

지난 주말 장충단의 그러나 가장 확실하게 '멋' 있는 성과는 '문화예술의 해' 를 이처럼 열었다는 사실 그 자체다.

종전 같으면 극장 단상을 높은 사람들이 차지하고 않아 천편일률의 축사 릴레이로 사람들을 하품나게 했던 개막 '식전' 대신 뭔지는 잘 모르지만 새로운 예술의 개막 '공연' 으로 참석자들에게 적어도 하품대신 '쇼크' 를 먹여줬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걸 허용한 문화관광부에 이번 이벤트의 가장 큰 공적은 돌아가야 할 것같다.

최정호 <울산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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