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사건추적] 교통사고 위장한 노인 ‘보험 살인’ … 엇갈린 처벌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1면

# 사례 1 교통사고 처리 뒤 밝혀진 살인 … 일사부재리 이유로 기소 안 해

지난해 9월 5일 충남 서천군 비인면의 해안도로. 승용차를 몰던 김모(47)씨가 길 옆을 걷던 박모(66·여)씨를 치어 그 자리에서 숨지게 했다. 4개월 뒤 대전지방법원 홍성지원은 김씨에게 ‘교통사고처리 특례법 위반죄’로 금고 4월을 선고했다. 김씨는 보험사에서 형사합의용 보험금을 받아 박씨 유족에게 1500만원을 건넸다.

<그래픽을 누르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김씨가 가입했던 M보험사가 석연치 않은 점을 발견했다. 김씨가 사고를 내기 불과 두 달 전 4개의 운전자 보험에 들었던 것이다. 그가 받은 보험금은 모두 1억1000여만원. 보험사 직원은 김씨가 남긴 ‘흔적’을 추적했다. 보험금 지급내역을 조사했더니 김씨는 충남에서 비슷한 사고를 두 번 더 냈다. 노인 1명은 숨졌고, 1명은 뇌진탕으로 8주 진단을 받았다. 1년4개월 동안 낸 3건의 교통사고 피해자는 모두 노인이었다.

보험사와 경찰의 조사 결과 김씨는 2006년 가을 운전자 보험에 처음 들었다. 사업에 실패해 신용불량자였지만, 보험 3개에 가입했다. 수천만원의 빚을 졌던 김씨가 납입한 월 보험금은 16만원가량. 그는 상담원에게 “사고가 나면 형사합의금이 중복 지급되느냐”고 확인도 했다.

2007년 5월 첫 번째 사고가 났다. 김씨는 충남 보령시에서 김모(74·여)씨를 치어 숨지게 했다. 그는 4개 보험사에서 형사합의지원금 등으로 1억3000여만원을 받아 피해자 유족에게 합의금 500만원만을 건넸다.

이어 김씨는 운전자보험 1개에 추가로 가입한 뒤 2008년 3월 충남 서천군에서 최모(69·여)씨를 치어 뇌진탕을 입혔다. 이때엔 피해자가 숨지지 않아 합의금·치료비 860만원을 건네고 합의했다. 그러나 김씨는 면허정지 위로금으로 보험사에서 1700여만원의 ‘부수입’을 올렸다.

세 번째 사고를 의심한 M보험사가 서울 서부지검에 고소하면서 김씨 범행의 전말이 드러났다. 서부지검은 보험사의 사고 조사 기록, 김씨가 보험 상담원과 통화한 내용 등을 바탕으로 단순한 교통사고가 아닌 고의적 살인임을 밝혀냈다.

하지만 서부지검은 ‘일사부재리의 원칙’ 때문에 그를 살인 혐의로 기소하지 않았다. 두 건의 사망 사건은 이미 교통사고처리 특례법 위반죄로 처벌을 받아서다. 다만 기소되지 않았던 2008년 3월 사건을 적용해 살인미수 등으로 기소했다.

서울 서부지법은 지난 9월 30일 김씨에게 징역 15년을 선고했다. 사건을 담당한 김정헌 판사는 “이 정도의 악질적 범죄는 무기징역으로도 부족하다. 뒤늦게나마 이런 정황을 고려해 보통의 사기·살인미수에 비해선 무겁게 선고했다”고 말했다. 김 판사는 “수사기관이 첫 번째 사고부터 철저히 조사했더라면 다음 피해자가 생기지 않았을 것”이라며 아쉬워했다.

김진경 기자

# 사례 2 “일사부재리는 무슨” … 살인 혐의 기소

반면 같은 종류의 사건에 대해 검찰이 ‘일사부재리’의 원칙을 적용하지 않고 다시 기소한 경우도 있다.

지난 3월 27일 오후 4시30분 전북 군산시 임피면의 한적한 도로. 자전거를 타고 가던 김모(81)씨를 승용차가 뒤에서 들이받았다. 김씨는 그 자리에서 숨졌다. 가해자 박모(33)씨는 지난 7월 전주지법 군산지원에서 교통사고 처리 특례법 위반죄로 금고 6월에 집행유예 1년을 선고받았다.

그는 사고 발생 석 달 전 2개의 운전자보험에 가입해 둔 상태였다. 박씨는 피해자 유족에게 5000여만원의 합의금을 줬지만 그가 보험사에서 받은 돈은 1억7000여만원이었다. 역시 단순한 교통사고로 묻힐 뻔했지만, 박씨는 다른 사건 때문에 덜미가 잡혔다.

전주지검 군산지청은 12일 박씨를 살인혐의 등으로 기소했다. 예외적으로 한 사건에 대해 피의자를 다른 혐의로 다시 기소한 군산지청은 “박씨는 고의로 사람을 죽이고 과실인 척 속였기 때문에 이 원칙의 적용 대상이 아니다”라는 입장을 밝혔다.

정중근 부장검사는 “철퇴로 다스려야 할 것을 회초리로 대신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라며 “악의적 범죄자들이 일사부재리의 원칙을 도피처로 악용하도록 내버려 둘 수 없다”고 말했다. 정 검사는 “이번 사건을 계기로 새 판례를 받아보려 한다”고 덧붙였다.

김진경 기자

◆일사부재리(一事不再理)의 원칙=사건에 대한 판결이 확정되면 이를 다시 심리·재판하지 않는다는 것. 헌법(제13조 1항)에 규정됐다. 형사소송법(326조 1호)에서도 확정판결 사건에 다시 공소가 제기되면 면소(免訴) 판결을 하도록 명시했다. 민사소송에선 이 원칙이 적용되지 않는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