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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두번째 무대 오르는 '고도를 기다리며'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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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7면

"아니! 또 '고도' 야?" 극단 산울림이 27일부터 사뮈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 를 12번째로 공연한다는 소식에 혹자들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또 "너무 우려먹는 것 아니야" 라며 빈정댈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단견이다. '고도…' 를 뜯어보면 한국연극의 발자취와 과제가 그대로 드러난다. 1969년 초연 이래 31년이란 긴 시간을 투시하는 '눈' 이 생긴다. 뒷얘기 또한 풍성하다. '연극계의 사자' 로 통하는 연출가 임영웅씨(66)의 뚝심과 집념이 있었기에 가능해진 일이다. '고도…' 의 어제를 통해 오늘을 정리해본다.

◇ 한국 현대극의 출발〓연출자 임씨는 처음에 절벽을 만난 느낌이었다. 사흘을 걸려 읽어도 뜻을 알 수 없었다. 배경이라곤 앙상한 나무 한 그루. 떠돌이 사내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의 공허한 말장난과 엉뚱한 행동 등. 임씨는 한바탕 웃어보자고 결론지었다. 작가조차 "즐겁게 웃으면 그만" 이라고 말했는데…. 그러나 근대 리얼리즘 연극과 일제 식민지극에 익숙했던 당시 관객에겐 충격 그 자체. 69년 초연 당시 베케트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해 관객동원에 덕을 보기도 했다. 지금은 '부조리극' '전위극' 대신 '현대의 고전' 으로 뿌리내렸다.

◇ 소극장 운동의 정착〓예나 지금이나 소극장이 어렵긴 하지만 초연 때만 해도 변변한 극장이 없었다. 69년 봄에 생긴 명동의 까페 떼아뜨르에서 부조리극을 올렸을 정도. 다행히 그해 하반기 한국일보 12층에 극장이 생겨 '고도…' 는 이곳에 입성하는 행운을 누렸다. 임씨는 85년 사재를 털어 신촌에 산울림 소극장을 국내 처음으로 만들고 개관기념으로 '고도…' 의 네 번째 무대를 올린 이후 소극장 운동에 몰두하게 된다.

◇ 본격 레퍼토리 시스템〓명저가 읽을수록 감흥이 깊어지듯 연극도 끝없이 보완해야 감동이 커진다. 그래야 한 극단을 대표하는 작품이 탄생한다. 안정적인 관객층을 확보하는 통로도 된다. '고도…' 에 견줄 만한 국내 레퍼토리는 고 추송웅의 1인극 '빨간 피터의 고백' 이나 김민기의 번안극 '지하철 1호선' 정도다. 숙성이 덜된 새 것만을 찾으려는 연극계 일부의 조급증을 반성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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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초의 프로듀서 체제〓극단이 없어 2회 공연까지 '신협' 의 이름을 빌렸던 임씨는 69년 산울림 극단을 만들면서 프로듀서 시스템을 도입했다. 기존 동인제의 취약점을 보완하고 직업극단의 면모를 갖췄다. 이후 '고도…' 를 통해 고 함현진씨를 비롯해 김성옥.김무생.김인태.전무송.정동환.송영창.한명구.안석환 등 많은 연극계 스타를 배출했다. 단지 출연자 5명 가운데 소년만은 나이 제한 탓에 자주 교체됐다. 과학적인 프로듀서 체제는 지금도 우리 연극계가 풀어야 할 숙제 가운데 하나다.

◇ 외국 작품의 자기화〓임영웅판 '고도…' 는 외국에서도 성가가 높다.89년 아비뇽 연극제, 90년 더블린 연극제, 94년 폴란드 공연 등의 호평에 이어 지난해엔 일본 아사히(朝日)신문이 99년 일본에서 공연된 최고의 연극으로 선정했다. 일본인들은 공연 비디오를 빌려가며 연구하기도. '임씨는 원작을 충실히 따르되 90년 더블린 공연부턴 길고 가냘픈 모양의 나뭇가지를 소나무 느낌이 나도록 손질하고, 소년의 옷도 양복 스타일에서 개량한복 비슷하게 고쳐 한국적 색채를 가미하기도 했다.

공연은 3월 5일까지 소극장 산울림에서. 화.수.목 오후 7시, 금.토 오후 3시 추가, 일요일은 오후 3시. (월 쉼). 02-334-5915.

박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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