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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5이후 남북 요구사항 이행 비교해 보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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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남북 정상회담 석달 만인 2000년 9월 정부는 북측이 송환을 요구한 미전향 장기수 63명을 모두 평양으로 보냈다. 하지만 북한은 6.25 국군포로와 납북 억류자 486명에 대한 생사 확인을 아직까지 거부하고 있다.

최전방의 확성기.전광판 등 체제선전물을 없애는 일도 마찬가지다. 남북 합의에 따라 우리 군은 지난달 2단계 공사를 완료했지만 북한은 제대로 이행하지 않았다. 남측만 철거한 꼴이 됐지만 북측은 재설치를 막는 조항을 합의문에 미리 넣어놓았다.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은 2000년 6.15 남북 정상회담 때 '전국적 범위에서의 민족해방'과 '온 사회의 주체사상화' 등 대남 적화통일 노선을 명시한 노동당 규약을 개정하겠다고 공언했다. 이후 4년이 지났지만 약속이 지켜지지 않았다. 최고지도자의 약속조차 이행하지 않는 게 남북관계의 현실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국가보안법 폐지 방침을 밝힌 데 대해 '우리만 일방적으로 무장해제를 하는 것 아니냐'고 걱정하는 쪽에서는 이런 대목에 신경을 쓴다.

북한은 6.15 공동선언을 계기로 보안법과 주한미군.국가정보원.주적론 등 이른바 '통일의 기본 장애물'을 제거하는 데 공을 들인 게 사실이다. 이 중 상당 부분 목표를 이미 달성했거나 임박한 상태다. 그 가운데 마지막 남은 것이 보안법이다. 동국대 고유환(북한학)교수는 "노무현 정부로서는 보안법 문제 등을 손보지 않으면 2차 정상회담 등 향후 남북관계의 실질적인 진전이 어렵다고 판단했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물론 북한은 자신들이 오히려 '통 큰 양보를 했다'고 주장한다. 동부전선 군사요충지인 금강산 일대를 남한 관광객을 위해 특구로 지정하고 현대 측에 독점적 권리를 줬다는 것이다. 개성공단 건설 과정에서는 2군단 등 이 지역 군부의 반발을 다독이느라 진통이 있었다는 얘기도 들린다.

이런 측면에서 정부 당국자는 7일 "북한의 눈에 보이지 않는 변화에 주목하라"고 말했다. 고유환 교수도 "남북 간의 법적.제도적 정비가 동시에 이뤄지면 좋겠지만 우리가 필요한 조치를 한 후 북측에 요구하는 것도 괜찮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하지만 보안법과 주적론 같은 사안을 경협문제와 견주는 것은 문제라는 지적도 있다. 금강산 관광은 현대가 9억4200만달러라는 막대한 대가를 줬고, 개성공단 개발에도 북측에 보상금이 지급되는 등 차이가 있다는 얘기다.

전문가들은 정부가 좀더 전략적인 시각을 갖고 남북 화해.협력의 틀을 짜야 한다고 지적한다. 긴밀한 한.미 공조가 이뤄졌다면 주한미군 감축과 미2사단 재배치를 남북 간 군사신뢰 구축의 전기로 삼을 수 있었다는 얘기다. 전문가들은 미군 감축을 평양~원산 이남선에 지상군의 70%를 집중 배치한 북한군의 후방 이동 문제와 연계하면 170㎜자주포와 240㎜방사포 등 군사위협을 줄일 수 있다고 여겨 왔다.

당국 대화를 통해 북측에 적극적으로 상응 조치를 요구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중앙대 제성호(법학)교수는 "남북 장관급회담 산하에 별도 기구를 만들어 통일의 걸림돌이 될 수 있는 법.제도를 상호 논의할 틀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영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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