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산 히말라야 속으로…] 4. 환상은 끝나고 희망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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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4면

네팔의 동서부를 횡단한 후, 나라얀가드 무글링을 지나 포카라에 도착했다. 포카라는 옛날 옛적에 7개 호수가 모인 곳인데, 페와 호수에 비친 히말라야는 색다른 감동으로 다가온다.

이번 여행길에 매일 새벽 문밖에서 들려온 "10분 후에 출발합니다. " 라는 소리에 잔뜩 경기(驚起)들려 있던 나는 오늘만큼은 가장 빠른 속도로 옷을 주워 입고 게스트 하우스 현관에서 일행을 기다렸다. 나같은 게으름뱅이도 고된 행로에 군기가 잡히기 시작한 모양이다.

새벽 5시다. 어둠 속에서 가이드를 자청하는 소년들이 손전등 불빛을 흔들며 말을 걸어온다. 산 중턱에 있는 롯지에 들러 찌아 한잔을 마시고, ' 싸늘한 바람이 감도는 산길을 더듬어 사란코트 전망대에 도착했다.

하나 둘씩 사람들이 몰려든다. 일출을 보려는 기대감에 들떠서 추운 줄도 모른다.

태양은 아직 산등성이 어딘가에 숨어서 보이지 않은 시간. 시커먼 능선을 따라 차츰 붉은 기운이 번져갔다. 하늘 높이 우뚝 솟은 마차푸차레 설탑과 안나푸르나 남봉의 정상에 빨간 기운이 맺혔다.

서쪽으로 치솟은 안나푸르나 1봉은 우주의 붉은 기운이 반사된 듯 어느새 형형한 빛을 발산한다. 어둠을 거느린 채 도도한 모습으로 치솟은 히말라야. 그 장엄함에 절로 탄성이 터진다.

문득, 아는 얼굴이 스친 듯 싶었다. 외투 호주머니에 두 손을 찌르고 어깨를 옹성거리며 지나간 단발머리 여자가 소설가 이혜경씨랑 비슷하게 닮았다.

3년쯤 전, 어느 사석에서 만난 그녀는 한국국제협력단(KOICA)일원으로 인도네시아에 자원봉사를 떠난다고 했다. 그런데 왜 여기에 있는 것일까. 내가 잘못 본 것일까. 주위에 동양 여자들 서넛이 있었는데 언뜻 한국말이 들렸다.

순간, 확신감에 차오른 나는 단발머리 여자를 향해 똑바로 걸어갔다. "이혜경씨 맞아요?" "네? 아, 김미진씨!" 이 먼곳에서, 그것도 이런 신새벽에 아는 사람을 만날 수 있는 확률은 서울 시내 한복판에서 번개에 맞을 확률만큼이나 희박할 것이다.

그녀와 나의 인연은 9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우리는 같은 출판사에서 거의 동시에 책을 냈다. 나로서는 처음으로 발표한 소설책이었고, 그녀는 오랫동안 글을 쓰지 않다가 문학상을 받으면서 그 작품을 출간했다. 그녀는 내가 등단한 후 제일 먼저 얼굴을 익힌 소설가다.

"그동안 인도네시아에서 한글을 가르쳤어요. 지난 30일에 휴가를 맞아서 이곳에 왔어요. " 그녀 앞에 어떤 인고의 시간이 있었는지 나는 모른다. 감히 짐작할 수 조차 없다. 그러나 아직 세수도 하지 않고 부스스한 얼굴이 그 어느 때보다도 아름다웠다. 히말라야는 우리가 떠나오기 전부터 이런 우연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일까. 오늘따라 저 태고의 봉우리는 더욱 신비하고 요염하다.

그 누가 히말라야의 진짜 모습을 본적이 있단 말인가. 히말라야는 바라볼 때마다 다른 표정이다. 음양이 깊게 패인 조각 같고, 눈보라 휘몰아치는 성난 얼음 덩어리 같은 히말라야. 환상적인 자태를 뽐내며 사람의 마음을 유혹하는가 하면, 투정을 부리는 아이처럼 아예 숨어버릴 때도 많다.

카멜레온처럼 수시로 얼굴을 바꾸며 구름 속에 숨어 있다가 가끔 도도한 자태를 드러내곤 하는 저 하얀 설산에선 뭔가 의식적이고 시적인 힘이 느껴진다.

히말라야는 산스크리트어로 '히마' 는 신이고 '말라야' 는 살고 있는 곳, 즉 '신의 거처' 를 의미한다. 전망대 주위에 둘러서 있는 사람들을 바라본다. 모두들 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다.

이 순간을 사진 한 컷에 모두 담을 수 있을까. 우리는 시간의 빈 자리에에 갇혀 있다. 무수한 선을 그으며 길을 가다가 우연히 한 점이 되어 만난 것이다.

우리는 왜 이곳에 왔는가. 무엇이 동시에 자석처럼 끌어당긴 것일까. 원시의 자연으로부터 추방된 호모 사이언스의 상실감이 신화의 젖줄을 흘러 유전된 것일까. 모를 일이다.

어떤 사람은 히말라야의 환상에 젖어서 이곳에 온다. 뭔가 특별하고 강렬한 경험이 자신들의 운명을 바꿀 거라 막연히 꿈꾼다. 그러나 히말라야에는 '히마' 만 있다.

아, 그리운 히말라야! 아침 햇살에 젖은 봉우리는 환상과 상상력에 대한 생각을 떠올린다. 환상과 상상력은 얼른 보기에 같아 보이지만 전혀 다른 뜻이다. 세상이 어수선하니 환상이 유행병처럼 번진다.

수상한 요기들이 요괴처럼 떠돌고, 요란한 구호가 진실로 탈바꿈한다. 한동안 X세대가 유행어의 선두를 달리더니, 이제는 e세대니 i세대 같은 단어가 낯설지 않다.

사이비 정치가와 학자들 상인들은 끝없이 이미지를 창출하고 또 폐기한다. 그들이 내뿜는 독설이 사회 전반에 핵우산처럼 씌워 있다.

누군가 쳐놓은 이미지의 그물에 걸려서 그것이 자신의 모습인 양 혼동하는 사람들. 그들은 자신이 떠나간 자리에 아름다운 꽃이 있음을 보지 못한다.

도(道)를 찾아 방황하는 자신이 바로 도임을 알지 못한다. 훌륭한 예술작품은 유기체적인 생명력으로 뻗어나간다.

인간의 삶 역시 그러하다. 제 스스로 갈 길을 찾아가는 자연이나 역사의 줄기처럼 모든 생명에는 스스로 이어가는 단 하나의 길이 있다. 길이 정해졌다고 모두가 끝까지 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움직이느냐다.

자극이 신경에 전달돼 일정한 운동이 일어나려면 에너지를 먹고 올라가다가 폭발을 일으켜야만 한다. 팔이 한번 움직일 때도 그 자극이 역치(□値.threshold)에 도달해야만 움직임을 수행한다.

환상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은 역치에 도달하지 못하고 작은 포물선만 그리다 만다. 환상은 고정된 것과 한정된 것 외에는 함께 놀 다른 대상을 갖고 있지 않다. 감각적인 재료들을 받아들여 연상법칙에 따라 재배열하는 것에 머물기 때문이다.

새로운 세기가 시작되었다. 대양을 향해 돛을 펼치고 힘껏 나아갈 때다. 거칠음과 혼돈과 무질서, 그러나 희망이 있다. 그 길을 밝히는 등불은 무엇인가. 창조적인 삶은 외부에서 투영된 덮개가 아닌 능동적으로 구축된 의지 속에 있다.

그것은 환상이 아닌 상상력의 세계다. 나는 히말라야 첨봉 아침 노을을 뚫고 퍼지는 햇살을 바라보며 '환상이 끝난 자리에 상상력이 시작한다' 는 말을 새삼스레 떠올린다.

글·그림=김미진<소설가·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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