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수류탄에서 원자로까지 (33)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5면

(33) 다시 돌아온 '친정'

1978년 7월 나는 다시 국방과학연구소(ADD) 레이저.야시(夜視)장비 부장을 맡았다. 1년만에 친정으로 돌아온 것이다.

그 사이 레이저실은 레이저부로 한 단계 격상됐다. 연구원들도 늘어나 부서 분위기가 한층 활기차 보였다. 그동안 나는 탄약개발부장을 맡아 국산 벌컨포의 발사 사고 원인을 밝혀 내느라 레이저 무기쪽은 잠시 손을 놓고 있었다.

그러나 레이저부로 돌아와 보니 레이저무기 개발은 예정대로 진행되고 있었다. 당시 가장 역점을 둔 사업은 '레이저 탱크사격 통제장치' 개발이었다.

레이저 탱크사격 통제장치란 레이저로 적의 탱크가 위치한 거리를 신속히 측정해, 정확히 목표물을 명중시키는 장치를 말한다.

탱크전(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신속한 거리측정과 정확한 명중률이었다. 구식 탱크는 적 탱크가 있는 거리를 측정하는 데 10초 이상이 걸렸다.

명중률도 거리가 멀수록 떨어져 평균 명중률이 30~40% 밖에 안됐다. 그러 레이저로 거리를 측정할 경우 10만분의 1초 밖에 걸리지 않았다. 게다가 거리 측정과 동시에 탱크의 포신(砲身)이 자동적으로 목표물을 조준하면 명중률을 80~90%까지 끌어올릴 수 있었다.

1973년 5월 ADD에 레이저실이 만들어진 직후 내가 레이저 거리측정기 개발에 곧바로 착수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탱크의 자동조준장치까지 개발하려 한 것은 1975년 여름부터였다.

레이저 거리측정기와 자동조준장치는 레이저 탱크사격 통제장치의 핵심 부품이었다. 그 무렵 국방부는 구식 탱크의 성능을 개선하려는 대책마련에 나섰다. 합동참모본부가 주관해 탱크 성능개선을 위한 관계기관 회의를 연 것이다.

합참에서는 당시 전략기획과 과장인 임동원(林東源.66.예비역 소장.국가정보원 원장)육군 대령이 대표로 참석했다.

ADD에서는 기동(機動)장비실장인 박철희(朴喆熙.66.인하대 기계항공자동차공학부 교수)해군 대령, 탱크개발 책임자 이재순(李載淳.66.건국대 기계항공우주공학부 교수)육군 중령, 레이저실장으로 공군 중령인 내가 참석했다.

회의에서 탱크 성능개선을 위한 세 가지 방안이 제시됐다. 먼저 ADD의 朴대령과 李중령은 "포신의 크기를 90㎜에서 105㎜로 하자" 고 주장했다. 요즘 표현으로 포신을 '업그레이드' 하자는 것이었다. 또 탱크의 주행거리를 넓히기 위해 기존의 가솔린 엔진을 디젤 엔진으로 바꾸자는 안(案)도 나왔다.

그러나 합참의 林대령과 나는 "레이저 탱크사격 통제장치를 개발하자" 고 주장했다. 무엇보다 적 탱크가 위치한 거리측정 시간을 최대한 단축하고 아군 탱크의 명중률을 높이는 게 시급했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당시 '꿈의 광선' 으로 불리는 '레이저를 이용하는 수 밖에 없었다.

참석자들은 열띤 토론을 벌였다. 회의에서 논의된 세 가지 방안이 모두 상부에 보고됐다.

그러나 합참은 최종안으로 레이저 탱크사격 통제장치를 개발하는 쪽으로 결론을 내렸다. 그 임무가 자연히 내가 실장으로 있던 ADD 레이저실에 떨어졌다.

나는 즉시 레이저 탱크사격 통제장치의 샘플을 구하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 당시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레이저무기를 개발하는 휴즈 에어크래프트社와 접촉하기 위해서였다.

이 회사는 미 육군에 각종 레이저 무기를 독점 납품했다. 그러나 휴즈 에어크래프트社는 한국에 레이저 탱크사격 통제장치를 두 대 들여와 그 성능을 보여주는 데만 무려 1백90만 달러를 달라고 요구했다.

나는 너무 기가 막혔다. 샘플을 파는 것도 아니고 단순히 보여 주는 데만 그같은 액수를 요구하는 것은 지나친 횡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휴즈 에어크래프트社는 전혀 양보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나는 하는 수 없이 미국의 또다른 무기 개발회사인 레이시온社로 발길을 돌렸다.

글= 한필순 전 원자력연구소장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