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안두희와 아르칸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백범(白凡)김구(金九)선생을 살해했던 안두희(安斗熙)는 1996년 10월 은신처를 찾아온 한 버스기사에게 몽둥이로 타살(打殺)당했다.

백범 사후 47년 만의 일이었다.

安은 그때 심한 중풍으로 와석 중인 70대 노인이었다.

'패역자' 안두희의 불행은 백범살해 배후의 숱한 비밀을 안고 구차하게 목숨을 부지해야 했다는 것이다.

사건 후 그의 삶은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닌 '생불여사(生不如死)' 바로 그것이었다.

그는 끝까지 백범살해를 자신의 단독범행이라고 우겼지만 그 말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끊임없이 安의 뒤를 쫓아다녔다.

그 역시 6개월, 1년마다 거처를 옮기며 두더지같은 생활을 계속했다.

그러나 소용이 없었다.

安은 60년대 이후 서울 일원에서 다섯차례 이상 이들에게 붙들려 칼을 맞거나 무자비한 각목세례를 받았다.

그러다가 安이 막상 한 시민의 '정의봉(正義棒)' 에 맞아 죽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물론 절대 다수는 '민족정기의 응징' 이니, '역사의 업보' 니 하는 말로 安의 죽음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예상됐던 반응이었다.

그러나 뜻밖이었던 것은 다른 한편에서 적지 않은 사람들이 "安을 죽이지 말아야 했다" 며 안타까움을 내비쳤다는 것이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안두희가 어떻게든 살아서 자기양심을 걸고 역사의 진실을 말할 기회를 폭력으로 빼앗아버린 데 대한 애석함의 표현이었다.

누군가는 "安을 그런 식으로 죽인 것은 일종의 사료(史料) 인멸행위" 라고까지 말했지만 조급한 감정과 폭력에 의한 보복이 행여 역사의 진실을 가리는 우(愚)가 될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발칸의 백정' '인종 청소업자' 등으로 악명을 떨친 보스니아 전범 아르칸이 며칠 전 베오그라드의 한 호텔에서 괴한들의 총격을 받고 숨졌을 때 세계 곳곳에서 나온 반응도 실은 비슷한 맥락의 것이었다.

코소보의 알바니안 등 그에게 직접 피해를 보았던 주민들은 "당연한 역사의 심판을 받았다" 고 환호했다.

그러나 또 다른 한쪽에선 "그를 살려 전범 재판정에 세웠어야 했다" 는 한탄의 소리도 흘러나왔다.

누가 어떤 의도로 아르칸을 죽였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분명한 것은 아르칸의 죽음이 그의 말문마저 영원히 닫아버렸다는 것이다.

당사자의 증언이 없으면 역사의 진실은 묻혀버린다.

아르칸이 저질렀던 숱한 반인륜적 잔혹행위.인종청소에 얽힌 진상과 배후를 이제 어디 가서 들을 것인가.

그보다는 그를 살려두고 양심을 되찾는 한없는 고통의 시간을 주어서라도 역사의 진실을 남김없이 증언하게 했어야 하지 않을까.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