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지방에선] "골마다 시비세워 문학향기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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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지난해 12월말 경북 포항시 대보면 호미곶 등대박물관 옆에 지절시인(志節詩人) 이육사의 '청포도' 시비가 세워졌다. 이육사는 현존하는 작품이 수십편에 지나지 않는다. 그 중에서도 인구에 회자(膾炙)되는 시가 청포도다.

그런데 그 청포도 시비가 하필이면 왜 동해안 호미곶에 서게 됐는가. 이육사는 안동출신이며 중국 베이징(北京)에서 수학하고 옥사한 시인이자 독립투사였다.

그 출생과 성장과정.활동상황을 살펴보더라도 시인은 생전에 포항과는 별 연고가 없는 듯하다. 하지만 해답은 포항 일월지 둔덕에 서서 영일만을 바라보면 자명해진다. 현재는 이곳에 해병사단이 주둔하고 있지만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는 유명한 포도원이었다.

하늘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는 청포도의 시상은 여기가 아니고서는 형상화되지 않는다. 실상 이육사는 1937년 요양차 포항 송도에서 머무른 적이 있었고 또 일월지 포도원을 찾기도 했다. 당시 이육사를 이곳으로 안내한 분들의 증언이다.

'이육사 시인은 길이 겨레의 심금을 울릴 명시를 창작하는 한편 조국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신명을 바쳤다. (중략)이 고장의 문인들이 여기 청포도의 산실(産室)영일만 들머리에 작은 돌을 세우나니 길손이여, 잠시 걸음을 멈추고 새맑고 그윽한 청포도의 시심에 잠기소서. '

청포도 시비의 비문이다.

포항지역은 본디 문학적 유물이 매우 드물다. 인근 청하면 보경사에 한흑구 문학비가 건립돼 있을 정도다. 그만큼 문학적 전통이 빈약하다는 뜻일 게다.

이웃한 일본의 경우 유명시인이 잠시 거쳐간 자취만 있어도 여러 개의 시비가 세워진다. 이제 우리도 지역 곳곳에 골골마다 문학과 예술의 흔적들을 남겼으면 하는 바람이다. 문학의 향기는 멀리 가고 오래 남는다.

손춘옥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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