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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 아쿠타가와상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시인 김수영(金洙暎)은 문학의 현실참여 문제를 둘러싼 평론가 이어령(李御寧)과의 논쟁이 막바지로 치닫던 1968년 6월 16일 불의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한데 그보다 41년 전인 1927년 일본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소설가 다니자키 준이치로(谷埼潤一郞)와 이른바 '이야기 없는 소설' 논쟁을 벌이던 소설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芥川龍之介)가 자살로 세상을 등진 것이다.

물론 이들 두 문인의 죽음은 논쟁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 金시인의 경우는 단순한 사고였을 따름이고, 아쿠타가와의 경우 그가 태어난 지 9개월 만에 어머니가 발광해 '미치광이 자식' 이라는 자각이 그를 끊임없이 괴롭혀왔을 뿐만 아니라 죽기 2년쯤 전부터 건강마저 크게 악화돼 치사량의 수면제를 털어넣은 것이다.

죽음의 동기야 어떻든 그들의 마지막 문학논쟁이 두고두고 회자돼오는 까닭은 거기에 그들의 문학관이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이다.

아쿠타가와와 다니자키 사이에 벌어진 논쟁은 좀 복잡하지만 간단히 말하면 아쿠타가와가 '이야기 없는 소설' 에서의 '이야기' 는 '예술적 가치' 와 무관하다고 주장한 반면 다니자키는 '줄거리의 재미는 사물을 짜올리는 방식의 재미, 구조의 재미, 건축적 아름다움의 재미' 이므로 예술적 가치가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는 주장이다.

요컨대 아쿠타가와는 '이야기' 를 부정하는 입장이었고, 다니자키는 '이야기' 를 긍정하는 입장이었지만 다니자키가 긍정하는 '이야기' 가 리얼리즘에는 배치되는 '모노가다리(物語)' 였고, 아쿠타가와가 오히려 사소설(私小說)적인 것을 추구했다는 점에서는 '이야기' 에 대한 이들의 긍정과 부정이 서로 뒤바뀌었다는 견해도 있다.

흥미로운 것은 후대의 비평가들이 당시의 논쟁에서는 아쿠타가와가 시종 밀리는 듯한 느낌이었지만 결국 현실적인 승자는 아쿠타가와였음을 인정했다는 점이다.

바꿔 말하면 그 이후 일본 소설의 흐름이 아쿠타가와의 소설 논법을 지향했다는 의미가 된다.

아쿠타가와의 이름으로 문학상이 제정되고 가장 역량있는 신인작가를 배출해 그의 이름을 빛내게 한 것도 그런 배경이다.

그 상이 재일동포 작가들과 인연이 깊다는 것도 우리로선 의미있는 일이다. 1960년대 이후만 해도 이회성(李恢成)을 비롯, 이양지(李良枝)와 유미리(柳美里)의 뒤를 이어 새 천년 첫 당선의 영예를 현월(玄月)이 차지한 것도 뜻깊다.

특히 이들이 한결같이 일본 속의 한국인 사회를 다루면서 인간의 근원과 본질의 문제를 파헤치고 있다는 점에서 일본 문학 속에서의 독립된 '틀' 을 기대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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