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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훈범의 시시각각

퀴 보노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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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6면

왜 아니겠나. 백범 같은 위인이라면 모를까 광기 서린 일제의 총칼 아래서 민족 지조를 지키며 살 수 있었던 조선인들이 얼마나 됐겠나 말이다. 한두 해도 아니고 40년 가까이 방치된 세계사의 그늘 속에서 하루 살기를 걱정하는 범부로서 언감생심 광복의 꿈을 품을 수 있었을까 말이다. 백범은 다 이해하면서도 유독 한 사람만은 용서할 수 없었다. 백범일지에 이렇게 전한다. “민족 반역자로 변절한 안준생(安俊生)을 교수형에 처하라고 중국 관헌에 부탁했으나 그들이 실행하지 않았다.”

안준생이 누군가. 우리가 자랑하는 독립운동가 중 부동의 1위 영웅인 안중근 의사의 둘째 아들이다. 그는 1939년 10월 15일 서울 장충단 공원, 지금의 신라호텔 자리에 있던 박문사(博文寺)를 찾는다. 이름 그대로 안 의사한테 사살된 조선총독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추모하려고 만든 절이었다. 준생은 이토의 영전에 향을 피우고 “아버지의 죄를 내가 속죄하며 보국의 정성을 다하겠다”고 맹세한다. 다음날엔 이토의 둘째 아들인 일본광업공사 사장 분키치(文吉)를 만나 직접 사과했다. 이 만남을 담은 사진은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 10월 18일자에 ‘극적인 대면, 여형약제(如兄若弟) 오월(吳越) 30년 영석(永釋)’ 즉, ‘형·동생으로 30년 원한을 영원히 풀다’라는 제목으로 대문짝만하게 실렸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전만 해도 준생은 독립운동에 관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조국과 달리 학교 보내주고 집 구해준 일제의 책략에 끝내 굴복하고 이용되고 만 것이다. 백범은 호랑이한테서 난 ‘개’를 용서하기 어려웠겠지만 나는 그를 친일파로 모는 시각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는 안중근의 핏줄이었기에 불운을 감내할 수밖에 없었던 희생자였을 뿐이며, 죄가 있다면 그것은 거사를 치른 애국자의 친아들 하나 제대로 추스를 수 없었던 부끄러운 조국이었다.

다행히 최근 한 좌파 단체가 펴낸 이른바 ‘친일인명사전’에는 그의 이름이 들어 있지 않다. 하지만 내 생각과 같은 이유가 아닌 모양이다. 그보다 친일 행적이 덜한 사람들이 친일파로 이름을 올리고 있으니 말이다. 만주국 중위였다는 경력만으로 친일파가 된 박정희 전 대통령이 대표적인 경우다. ‘시일야방성대곡(是日夜放聲大哭)’으로 을사늑약을 규탄한 위암 장지연 같은 이도 친일적인 글 몇 편 탓에 더러운 이름이 되고 말았다. 반면 좌파 인사로 신문에 학병 권유문을 썼던 몽양 여운형 같은 이는 무슨 이유인지 명단에서 빠졌다.

이런 중심 잃은 선정으로 누가 무엇을 얻는지 모르겠다. 식민지 시대에 살아남기 위해, 후배 기자에게 떠넘기지 않고 주필로서 스스로 짐을 진 사람들을 을사오적과 같은 부류로 만들어 대한민국 국민 중 누가 득을 볼 수 있는지 모르겠다. 이런 사전은 차라리 없는 게 낫다. 미국 독립전쟁 뒤 조지 워싱턴 대통령과 찰스 톰슨 대륙회의 의장은 회고록을 쓰지 않기로 합의한다. 독립이라는 영광스러운 대의(大義)도 지도자들의 욕심 탓에 얼마나 자주 재앙을 맞을 뻔했는지 국민들이 알면 환멸을 느낄 게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쓰려던 사실이 우리처럼 왜곡된 가치 판단에서 나온 것이라면 더욱 그랬을 것이다.  

이훈범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