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금술사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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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호 33면

‘땅속에 묻혀 있는 것은 모두 회임 상태다. 모든 광석은 계속 자라나 결국엔 금이 된다.’ 말도 안 되는 얘기지만 유럽인들은 16세기까지 실제 그렇게 믿었다. 쇳덩이를 땅에 파묻어 두고 기다리기만 하면 금이 된다니, 얼마나 솔깃한 얘기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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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인간의 욕심이 가만 있을 리 없다. 금속의 생장을 촉진시켜 빨리 금을 만들 생각을 누군들 하지 않겠나. 이를 생업으로 삼던 사람들이 바로 연금술사였다. 지금은 황당무계한 마법사쯤으로 치부하지만 중세엔 어엿한 직업인이었다고 한다.

연금술의 논리는 간단하다. 모든 금속은 잠재적인 금이다. 하지만 대지가 어떤 장해에 부닥치면 유산이나 기형이 생겨난다. 그래서 나온 게 하급 금속이다. 따라서 그런 장해 요인을 막아 자연의 원리를 도와주는 기술이 필요하다…. 근대 과학의 선구자인 13세기 영국의 로저 베이컨도 그 연장선에 섰다. 그는 연금술을 ‘비금속에서 모든 불순물과 부패물을 제거함으로써 순수한 금을 만들어내는 기술’로 규정했다.

여기에 샤머니즘적 색채도 가미돼 중세 연금술사는 광물을 성숙시키고 금속을 순화하는 기술자로 여겨졌다. 그렇게 연금술은 한 시대를 풍미한다. 물론 아무도 금을 만드는 데 성공하진 못했다. 그 의도나 발상이 근대 야금술에 일부 영향을 줬을 뿐이다.
허황되긴 했지만 연금술사가 존재했다는 건 금의 지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연은술사’나 ‘연동술사’가 없었던 걸 보면 역시 금은 금이다. 금의 화학기호인 Au는 ‘빛 나는 여명’을 뜻하는 aurora에서 나왔으니, 이름 자체에 신비로운 광채가 서려 있는 셈이다.

이렇게 금은 고귀하고 불변의 가치를 지닌 금속이다. 그런 가치가 통화제도로 연결된 게 곧 금본위 제도다. 통화량을 그 나라의 금 보유량과 일치하게 해 놨으니 통화가치를 안정시키는 효과를 낳는다. 그러나 무역적자나 환율 불안으로 금이 해외로 유출되면 경기가 심각하게 위축된다. 금이 없으면 돈을 퍼부어 경기를 부양시킬 수가 없기 때문이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극심한 인플레를 막기 위해 선진국들이 금본위 제도를 채택했는데, 이게 1930년대 대공황의 원인(遠因)이 됐다는 분석도 있다. 당시 미국에선 후버 대통령이 금본위 제도에 집착해 대공황을 수습하지 못한 반면에 루스벨트 대통령은 이를 과감히 포기했다. 지금도 상당수의 경제학자들은 미국이 대공황을 극복할 수 있었던 직접적인 원동력으로 뉴딜 정책보다는 금본위 체제로부터의 이탈을 꼽는다. 금과 통화량의 연결고리를 끊음으로써 통화 공급을 늘려 경기를 자극할 수 있었다는 얘기다.

그런데 요즘 금의 가치가 다시 뜨고 있다. 너무 많이 풀린 돈, 그래서 생겨난 거품, 이게 터져 벌어진 위기, 이를 틀어막으려고 다시 풀어 제낀 돈…. 이쯤 되자 사람들의 눈길은 금으로 쏠린다. 그래서 금값은 연일 사상 최고치를 갈아치우고 있다. 금광 개발도 촉진되고 있다. 역설적으로 금의 지위를 강화시킨 현대의 연금술사는 바로 각국 중앙은행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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