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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자들의 인터넷 사이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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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http://cafe.daum.net/04sorentorecall)

인터넷 동호회인 '04년식 쏘렌토 미션 정식 리콜 추진 카페'의 인터넷 주소다.

이 모임은 e-소비자 운동의 본격화를 알리는 상징적인 존재다. e-소비자는 자신의 제품 소비 경험을 인터넷을 통해 알리고 행동하는 사람들을 말한다.

이 모임 회원 중 300여명은 쏘렌토 SUV(스포츠 유틸리티 차량) 제조사를 상대로 지난달 말 6억여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보기 드문 소송을 냈다. 불만의 대상은 이 회사가 처음으로 국내 조립 5단 변속기(미션)를 붙인 2004년식 쏘렌토. 소송 제기자들은 "높은 엔진 회전수(RPM)에 올라가야 변속이 이뤄지고 갑작스러운 전후진 불능 등 변속기의 복합적 결함이 아주 심각하다"고 주장한다.

몇 명이 지난 3월 인터넷에 모임을 만들자 회원 수는 금방 1만3000여명이 됐고, 그동안 제조회사 앞에서 차량 시위도 벌여왔다. "소비자의 취향 문제이지 안전문제는 아니다"고 버티던 회사 측은 6월에 리콜(무상 교환수리)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구입자들은 그러나 이 리콜이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며 반발, 소송까지 낸 것이다. 수입 변속기를 붙인 쏘렌토는 국내외에서 히트 상품으로 뽑히는 상황에 벌어진 일이어서 회사 측은 아주 곤혹스러운 표정이다.

레조 LPG 차의 엔진 관련 리콜도 아이레조(irezzo.com) 동호회원 등이 인터넷에서 줄곧 문제제기를 해 시행된 것이다. 이 리콜도 불완전한 것이라며 구입자 수십명은 최근 손해배상 소송을 내 대응 수위를 높였다.

이런 게 가능해진 것은 인터넷 덕분이다. 피해 사례가 금방 모이고 소비자 간 연락망이 바로 만들어진다. 미국의 랠프 네이더가 했던 것 이상으로 강력하고 구체적인 소비자운동이 가능해진 것이다. 미국.일본.독일 등에서도 자동차 리콜이 급증하고 있는 것은 e-소비자들의 준동(?) 영향이 크다.

소비자들의 인터넷을 통한 사이렌 울리기는 여러 분야에 확산하고 있다. 온라인 게임 이용자 모임인 온라인소비자연대(antinc.co.kr)는 7월 게임 공급업체인 N사를 상대로 약관 무효 및 손해배상 소송을 냈다. 잦은 서버 고장, 비싼 이용료 등을 문제삼는다.

이 밖에도 증권 투자자들의 공동 문제 제기, 백혈병 환우회가 글리벡(치료제)에 건강보험 적용을 이뤄낸 싸움 등 곳곳에서 소비자들이 뭉치고 있다.

기업이나 정부 측은 이런 사태에 대해 쉬쉬하거나 '꾼'들의 소행이라며 불쾌해 하는 경향이 여전한 것 같다. 그러나 인터넷 시대에 덮어두기는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일본 미쓰비시 자동차가 좋은 예다. 차량 결함을 여러 차례 은폐한 사실이 확인되면서 간부들이 6월에 줄줄이 체포됐고, 판매량도 격감했다.

일부 깨인 기업은 소비자들의 인터넷 반응을 신제품 개발에 활용한다. 까다로운 소비자를 탓하지 말고 응원군으로 환영해야 한다. '소비자의 선물'로 생각하라. 1980~90년대 일본 제품의 경쟁력이 하늘을 찌른 것은 일본 소비자들의 까다로움이 세계 1등인 덕분이었다. 일본 소비자를 감동시켜 일본 1등을 하면 세계 1등 제품이 됐다. 일본 소비자들은 오이 하나라도 구불구불하면 사지 않는다. 깔끔하고 완벽해야 통한다.

다행히 국내 소비자들이 세계 정상 수준의 까다로움을 보이는 단계에 왔다. 기업들은 말 많은 소비자들과 '동침'하라. 한국 소비자의 오감을 충족시키면 지구촌 소비자들이 줄을 설 것이다.

김 일 디지털 담당 부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