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 위원장 해외방문 때 왜 비행기 안 탈까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9면

▶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지난 4월 중국 톈진(天津)시를 방문하고 평양으로 향하는 기차에 올라 환송객들에게 손을 흔들고 있다. [통일문화연구소 자료]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중국이나 러시아를 방문할 때 비행기 대신 열차 이용을 고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배경으로 국내외 북한 전문가들 사이에선 김 위원장의 고소 공포증, 북한에 국가원수 전용기인 공군 1호기가 없다는 점 등이 거론돼왔다. 또 장시간 북한을 비워도 아무 문제가 없다는, 체제유지에 대한 자신감의 표출이라는 분석도 있었다.

최근 북한의 강석주(사진) 외무성 제1부상이 김 위원장의 러시아 방문 3주년을 맞아 펴낸 '김정일열풍'(근로단체출판사)은 이에 대한 궁금증을 어느 정도는 풀어주고 있다. 중앙일보 통일문화연구소가 이달 초 입수한 이 책에 따르면 김 위원장은 해외 방문시 최대한 많은 도시를 둘러보기 위해 열차 이용을 고집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강 제1부상은 2001년 7월 김 위원장의 모스크바 방문을 앞두고 김 위원장에게 7일이나 걸리는 열차 대신 비행기 이용을 적극 권유했다. 여기에는 나름대로의 논리가 있었다. 우선 북한 외무성은 러시아 지방도시들의 치안이 불안정했기 때문에 김 위원장이 열차를 이용할 경우 그의 신변이 위태롭다고 판단했다. 또 긴급히 처리해야 할 국정 현안들이 쌓여 있는데, 김 위원장이 20여일씩 나라를 비우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고 보았다.

장기적으로는 1990년대 초반 이후 러시아에 불기 시작한 개혁.개방의 여파로 인해 북.러 관계가 아직 만족할 만한 수준에 이르지 못했다는 점도 고려됐다는 것이다.

그러나 김 위원장은 "비행기를 타고 훌 날아가서 하루 이틀 자고 또 훌 날아오는 것은 다른 나라 수반들이 다 하는 것"이라며 "나는 열차를 타고 여러개의 도시들을 돌아보면서 모스크바에 갔다오려고 계획한 것을 철회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이 책에서 눈길을 끄는 또 다른 대목은 에리히 호네커 전 동독 공산당 서기장이 독일 통일 직후인 90년 12월 김 위원장에게 북한으로의 망명을 요청한 사실이다. 당시 호네커는 90년 10월 독일 통일 직후 곧바로 당 서기장과 국가평의회 의장직에서 해임됐다. 특히 당에서도 제명된 데다 체포장까지 발부된 상태로 궁지에 몰려 있었다.

이 책에 따르면 호네커의 긴급 구원 요청이 김 위원장에게 전달된 것은 오전 3시. 당시 북한 외무성 관계자들은 호네커의 망명을 받아들일 경우 초래될 정치.경제적, 외교적 파장 등을 고려해 그의 망명 허용을 망설였다고 한다. 그러나 김 위원장은 이 사실을 오전 3시가 조금 지나 김일성 전 주석에게 곧바로 보고한 뒤 외무성 관계자들에게 그를 북한으로 데리고 올 비행기를 독일 현지에 대기시켜 놓으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호네커는 북한 대신 러시아로 피신했다가 92년 7월 독일로 강제 소환돼 재판을 받던 중 93년 칠레로 망명했다가 94년 5월 숨을 거뒀다.

이동현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