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3세기를 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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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구약성경 '창세기' 제5장을 보면 하나님이 남자와 여자를 창조해 '사람' 이라 일컫기 시작했을 때 그 수명(壽命)은 9백년 안팎이었다고 기록돼 있다.

우선 아담이 9백30년을 살았고, 형 카인에게 살해된 아벨 대신 태어난 셋은 9백12년을 살았다고 한다.

그 후의 자손들이 모두 9백년 안팎을 살았으며, 아담의 7대손인 므두셀라에 이르러서는 9백69년의 최고수명을 기록한다.

인류가 창조됐을 때 본래 조물주로부터 점지받은 수명은 그 정도였다는 뜻이다. 그러나 '카인의 저주' 로부터 시작된 인류의 비극은 아담의 자손들이 장수(長壽)를 즐기며 번성하면서 악과 타락의 길로 치닫는 양상을 보인다.

인류의 창조를 후회한 하나님이 노아 일가만 남겨놓고 인류를 멸망시킨 뒤에도 노아의 후손들은 다시 악과 타락에 물들기 시작한다. 흥미로운 것은 노아가 9백50년을 살고 세상을 떠난 후 인간의 수명은 갈수록 줄어들었다는 점이다.

곧 악과 타락이 심해질수록 상대적으로 인간의 수명은 줄어들었음을 구약성경은 강조하는 것이다.

19세로 기록되고 있는 고대 그리스인들의 평균수명은 아마도 '창세기' 가 암시하는 인간수명의 하한선일 것이다. 그러나 과학의 발달과 함께 인류의 타락과 수명은 정비례하기 시작했다.

현대에 이르러 인류의 타락은 그 끝이 보이지 않을 지경에까지 이르고 있는데도 수명 연장을 향한 인간의 꿈은 착실하게 영글어가고 있다.

앞으로 20, 30년 후면 1백20세까지는 무난하다는 게 정설처럼 돼 있는가 하면 21세기가 가기 전에 1백50세로 늘릴 수 있다는 보고서가 발표된 적도 있다.

심지어 지구가 멸망하지 않는 한 어느 땐가는 4백세가 인간수명의 최대 기대치가 되리라 보는 견해도 있다.

이쯤 되면 과학의 힘이 하늘의 섭리를 확실하게 뒤엎는 셈이니 모든 가치관이 전도되고 마비될 가능성도 없지 않다.

새 천년을 맞으면서 19세기 말에 태어난 1백11세의 할머니가 3세기를 산 인물로 화제에 오르는가 하면 불과 몇분의 차이로 1999년생과 2000년생으로 갈린 쌍둥이 형제가 각광받고 있다.

'창세기' 의 시대라면 3세기를 산 것이 화제에 오를 까닭이 없고, 1천년 단위의 앞 뒤 탄생도 대수로운 것이 못된다.

문제는 우리 인간의 삶이 갈수록 늘어나는 수명이나 새 천년 맞이에 각별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만큼 가치가 있느냐 하는 것이다.

새 천년을 맞아도 새로워지는 것, 달라지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면 몇백년을 산다 한들 무슨 좋은 꼴을 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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