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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의 눈] 100억원짜리 발상전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최근 경북 봉화군(奉化郡)이 그럴싸한 일을 해냈다.

발상의 전환이었다.

봉화군청은 1백20억원짜리 공사에 대해 '생각을 바꿔' 12억원으로 해답을 찾아냈다.

새 청사용 임야를 샀으나 야산을 깎는 비용만 1백20억원이 든다는 계산이 나왔다.

고민이 거듭됐다.

한 회의에서 "농민들이 객토(客土)용으로 흙을 가져가게 하자" 는 제안이 나왔다.

그러나 "관련법규 때문에 공무원만 다친다" 는 반대론이 강했다.

1억원 이상 공사는 반드시 공개입찰을 하게 돼있는 중앙정부 규정 때문이다.

결국 엄태항(嚴泰恒)군수가 결단을 내려 일을 밀어붙였다.

군청측은 흙을 가져가는 주민에게 한 트럭당 1만원씩을 주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흙 처리비는 12억원으로 충분했다.

게다가 객토를 한 농민들은 땅심이 좋아져 수확량까지 늘었다고 한다.

경직된 규정을 융통성 있게 돌파해낸 봉화군청의 멋쟁이들에게 우리는 박수를 아낄 필요가 없다.

생각을 조금만 바꾸면 국리민복(國利民福)에 도움이 되는, 시민을 고객으로 섬기는 자치행정을 멋있게 해낼 수 있음을 입증한 때문이다.

경남도청이 지난해 3월 처음으로 만들어낸 '여권(旅券) 1시간 내 발급제' 도 눈길을 끈다.

여권은 발급받는 데 3일에서 7일 이상 걸렸다.

경남도는 여권이라는 '행정상품' 에 대해 누구보다 먼저 발상의 전환을 했다.

기업이라면 고객을 이렇게 불편하게 할 수 있겠느냐는 게 혁파의 출발점이었다.

시청에서 신청 한시간만에 여권을 받아든 시민들(경남도의 경우 연간 15만여명)은 "어허, 이렇게 신통할 수가" 를 연발했다.

그러나 실은 이게 정상인 것이다.

행정이라는 것, 정부라는 것은 이런 서비스를 위해 존재해야 마땅했다.

주인이자 고객인 시민이 위임한 일을 규제덩어리로 만들어 이른바 '끗발' 을 부려온 오랜 관행이 뒤늦게 무너지고 있을 뿐이다.

여권 퀵서비스 시책은 이후 전국의 10여개 자치단체로 확산됐다.

새 밀레니엄. 그렇게도 많이 화두(話頭)에 올랐던 새 천년이 시작됐다.

우리의 중앙정부와 자치단체는 20세기 내내 완고하게, 권력을 자의적으로 휘두르기만 해왔다.

위의 두가지 '히트 행정' 은 한 세기를 마무리하는 시점에 와서야 간신히 시작된 작은 변화의 몸짓이다.

이 변모는 각성한 시민의식이 행정에 변혁을 요구해 이뤄지고 있다.

과거처럼 생산성 없이 시민 위에 군림만 하는 관청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게 요즘 시민사회의 분위기다.

지난 천년간 한반도는 지구촌 가운데서도 중앙집권과 강압통치의 전통이 두드러진 동토(凍土)였다.

백성들은 관(官)에서 부른다면 두려움에 날밤을 새워야 했다.

또 구명(救命)이나 인허가를 위해 쌈지를 털어야 했다.

그렇다면 새 천년 한반도의 으뜸 화두 가운데 하나는 중앙집권의 혁파, 지방자치의 개화가 아닐 수 없다.

이 과업을 어떻게 이룰 것인가□ 이 고민은 즐거이 날 밤을 새울 만한 것이다.

다행히도 1932년에 내려진 미국의 대법원 판결이 우리에게 하나의 힌트를 준다.

이 판결은 " '정책 실험' 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지방자치제의 행복한 결과다.

따라서 중앙정부는 지방의 특수성을 무시한 통제를 해서는 안된다" 는 '속시원한' 내용이었다.

이 쟁송은 한 주(州)정부가 공기업으로 얼음공장을 하려한 데서 비롯됐다.

연방정부가 "행정기관은 이익추구를 할 수 없다" 며 제동을 걸자 주 정부가 소송을 낸 것. 이 판결은 '맥도널드 (미리 만들어져 있는 햄버거)대 버거킹 (고객 취향대로 만들어주는 햄버거)판결' 이라는 애칭이 붙어 있다.

자치단체가 자신의 고객에게 적합한 정책을 시행하는데 대해 중앙정부가 '감 놔라 배 놔라' 할 수 없다는 미국 법원의 선언인 것이다.

지방자치는 '정책의 실험실' 이 돼야 한다는 의미다.

따라서 새 천년 한국의 지자체들은 자신의 고객을 만족시킬 수 있는 창의적이고 실험적인 시책 개발에 명운을 걸어야 한다.

또 시민단체들은 목청 높여 이를 촉구해야 한다.

선진국들은 일류 시책의 상당수가 작은 자치단체에서 창안.실험돼 전국에 확산되고 있다.

창의적 정책의 주도권이 지방에 있으니 지방분권이 안될 수가 없다.

또 중앙정부의 간섭이 부당하다고 생각되면 소송을 내 씨름을 벌인다.

새 천년 지방자치를 창의적 정책의 실험실로 만들자. 이를 위해 퇴근길의 공직자들은 이 말을 되뇌어보자.

"나는 오늘 고객(시민)을 위해 무엇을 했는가. "

김일 전국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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