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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로 맞추자] 밀레니엄 직언 -박원순 변호사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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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 정치여 더이상 발목잡지 말라

사람들은 희망을 말한다.

새로운 세기, 새로운 천년은 희망의 시대가 될 것이라고 덕담을 얘기한다.

장밋빛 낙관이 신문과 방송을 장식한다.

자유와 평등의 확산, 기술의 진보와 삶의 질 향상이 가져올 인류의 미래를 예상한다.

하지만 이 새해, 새 세기, 새 천년의 첫날 아침, 유감스럽게도 이러한 희망과 낙관에 이의를 제기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있다.

그렇다.

온전히 맨정신을 가지고 우리의 현실을 바라보자. 진정으로 내일이 희망과 낙관으로 가득한가를 살펴보자. 오늘 우리는 희망보다 좌절과 불안을 더 느낄 수밖에 없다.

9시 방송 뉴스시간을 자식과 함께 바라보고 있기가 두렵다.

신문 사회면을 보기가 부끄럽다.

부패와 비리와 사기로 얼룩진 세상이다.

부패공화국.사고공화국이란 말이 횡행한다.

수십억원을 꿀꺽한 고위 공직자가 검찰청사 입구에서 카메라 플래시를 받는 모습은 일상사가 됐고, 사고로 가슴을 치는 부모들의 모습은 더 이상 뉴스가 되지 않는다.

어느 사고로 자식을 잃은 어머니는 아예 보따리를 싸고 조국을 떠났다.

그녀의 가족과 함께 희망도 이 한반도를 떠나고 있다.

정치는 썩고 경제는 병들고 사회와 문화는 낙후됐다.

21세기를 희망으로 장식할 구석이 어디에 있는가.

이런 때에 우리에게 다가온 IMF 경제위기는 차라리 축복이었다.

우리가 발전시켜온 경제개발 모델, 우리가 신주처럼 모셔온 의식과 가치관, 우리가 자랑스러워한 풍요로운 사회에 대한 경고였다.

그것들을 바꾸고 새로운 사회체제와 의식을 만들라는 요구였다.

그러나 그 절호의 기회를 우리는 삭히고 있다.

IMF 이전과 이후에 달라진 것이 별로 없다.

우리를 위기로 몰아넣었던 과거의 체제와 이념에 대한 본격적인 개혁과 새로운 시대에 대한 고민이 없다.

대통령과 국민회의가 야당시절 그토록 요구했던 부패방지법.특별검사제.인사청문회…, 그 아무 것도 제대로 실현되지 않았다.

새로운 시대로 열어갈 체제가 갖춰지지 않았다.

그 원죄로 지금 옷로비 하나만으로도 이렇게 만신창이가 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 정권이 끝나는 날, 터져나올 부패와 비리의 연속타는 어찌할 것인가.

유감스럽게도 문제는 이 정권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에 있다.

이 나라 정치와 경제, 나라와 민족의 운명이 걸린 문제다.

이대로 가다간 오늘은 어제의 연속이며 내일은 오늘의 연장일 뿐이다.

21세기 벽두에 천지개벽이 없다면 오늘 이 칙칙하고 추한 모습이 내일 갑자기 오색무지개 색깔로 바뀌진 않을 것이며 이 모든 왜곡과 후진과 부조리가 한꺼번에 사라질 리 만무하다.

어느날 종말이 와서 우리를 구름에 태우고 천국으로 인도하기를 믿는 휴거의 신자들이 아니라면 오늘 마땅히 우리는 우리의 현실과 그 대안을 고민해야 한다.

역사에 공짜는 없다.

비약도 없다.

정직한 것이 역사다.

우리가 그리는 대로 도화지에 나타날 뿐이다.

파란 색칠을 하면 파란 색깔로,빨간 색칠을 하면 빨간 색깔로 나타난다.

이대로라면 희망보다 절망이 더 크다.

희망의 조건과 환경을 찾을 길이 없는 것이다.

21세기의 해는 밝았다.

우리가 원했든, 원치 않았든 새로운 시대의 동은 터온 것이다.

2000년 벽두인 4월에는 총선이 있다.

우리들의 선량을 뽑는다.

한국호의 키를 잡고 21세기의 바다를 저어갈 국회의원들을 선출하는 것이다.

여기서 어떤 정치인들이 우리의 의정단상을 장악하는지, 어떻게 정치권이 재편되는지에 따라 21세기 출발선의 정치지형, 더 나아가 우리 사회의 향방이 갈리게 돼있다.

모든 것을 살려야 할 정치가 이땅에서는 오히려 모든 것의 발목을 잡아왔다.

정치 때문에 경제가 병들고 문화와 사회가 뒤처졌다.

정치는 전염병이었고 정치인은 부패의 대명사로 지탄받았다.

천문학적인 돈을 써야 국회의원이 되고 국회의원이 되면 물먹는 하마처럼 온갖 이권에 개입하고 로비의 대상이 되기 십상이었다.

정경유착으로 경제까지 못살게 만들었다.

기업인이 한명 구속되면 리스트 하나가 출현했다.

청와대의 전 주인들이 가야 할 곳도 감옥이었다.

아직 어떤 대통령 후보도, 그가 여당 후보였든 야당 후보였든 거대한 정치자금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혹자는 이탓 저탓 타령을 하지만, 바로 제도의 탓이었으며 사람의 문제였다.

21세기까지 이 오염을 이어갈 수는 없다.

정치판을 완전히 새로 짜지 않으면 안된다.

구시대의 정치는 저물어간 20세기의 저편으로 흘려보내고 전혀 새로운 모습의 정치를 이땅에 살려내지 않으면 안된다.

제도를 바꾸고 사람을 바꿔야 한다.

부패와 비효율과 정쟁의 어둡고 더러운 모습은 이제 과거의 기억으로만 남게 해야 한다.

아직도 돈으로 정치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에게는 오직 낙선과 패배와 굴욕만을 안겨주어야 한다.

돈 없이도 오직 깨인 의식과 깨끗한 정신과 훌륭한 능력만으로 시장도 되고, 국회의원도 되고, 대통령도 될 수 있어야 한다.

그리하여 우리도 패기만만하고 재기발랄한 엘리트 젊은이들이 정치권으로 진출해 이 세상을 확 바꾸도록 해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누가 이 의식을 치러주랴. 썩은 정치를 장사지내고 희망의 정치를 실현하는 그 험하고 힘든 일을 누가 대신해 주랴. 우리 국민 각자의 손이 아니면 누가 그 어려운 일을 해주랴. 결국은 우리 국민들 자신뿐이다.

우리 스스로의 힘에 의해 이 개벽을 이뤄내야 한다.

우리의 투표에 의해 지난 어두운 과거를 심판하고 새로운 미래의 희망을 만들어야 한다.

한때 "부산 영도다리 밑에는 투표를 잘못해 잘라낸 손가락이 둥둥 떠다닌다" 는 우스갯소리가 떠돌았다.

찍고 나서 후회하는 일이 더 이상 있어서는 안된다.

자신이 엉터리 정치인들을 뽑아놓고 정치를 욕하고, 국회의원을 욕하는 '누워서 침뱉기' 의 어리석음을 계속 저질러서는 안된다.

밝은 희망의 21세기를 가지느냐 못가지느냐는 온전히 우리의 손에 달려 있다.

제대로 투표하는 손은 위대하다.

박원순 변호사.참여연대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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