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구실 못하는 경복궁 앞 자전거도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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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동문 앞의 자전거 도로 위에 버스가 정차해 있다. 버스·택시의 불법 주·정차 때문에 유명무실한 자전거 도로가 돼 버렸다. [최승식 기자]

지난달 30일 오후 1시쯤 서울 종로구 경복궁 동문 앞. 왕복 4차로 양끝에 빨간색으로 칠해져 있는 자전거 도로 위에 관광버스 2대가 불법 주차해 있다.

자전거를 타고 이 길을 지나가던 한선우(32·자영업)씨는 어쩔 수 없이 자전거를 끌고 인도로 올라와야 했다. 한씨는 “경복궁 주변은 자전거로 둘러보기 좋은 곳인데 이용하기에 불편한 점이 많다”고 말했다. 3시간 남짓 동안 자전거로 이곳을 지나는 사람은 5명에 불과했다.

서울시는 8월 서울의 명소인 경복궁을 자전거로 타고 돌아볼 수 있게 한다며 자전거 도로를 만들었다. 경복궁 동문 입구에서부터 춘추관 앞까지 이어지는 4차로 삼청동길(540m) 양끝에 폭 1.1m의 공간을 확보했다. 경복궁역에서부터 인사동 입구를 잇는 경복궁길(960m)의 광화문 쪽에도 자전거 길을 냈다. 일종의 ‘문화·역사 탐방 코스’다. 공사비로 3억5000여만원이 들었다.

그러나 서울시가 경복궁 주변에 만든 자전거 도로가 시민들로부터 외면받고 있다.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에게 이 도로는 불편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우선 경복궁 안의 주차공간이 부족해 삼청동길에 관광버스가 불법주차하면서 자전거 도로를 막는다. 또 경복궁 동문 앞과 국립민속박물관 앞에 버스정류장이 있어 버스가 자전거 도로 위에 정차하기 일쑤다. 여기에 택시까지 가세해 자전거 도로 위에서 손님을 태우거나 내린다. 삼청동 주민 박혜영(42·여)씨는 “택시 타고 내리기 좋은 갓길이 된 것 같다”며 “자전거를 타고 다니기에는 위험하다”고 말했다.

경복궁 자전거 도로는 춘추관에서 끊겨 경복궁을 자전거로 한 바퀴 돌아보려면 어쩔 수 없이 인도를 이용해야 한다. 삼청동 음식점이 줄지어 있는 삼청동로 입구에서도 끊긴다. 삼청동·인사동·안국동 등에서는 자전거를 타고 올 수 있는 길이 없어 경복궁은 ‘고립된 섬’처럼 돼 버렸다. 결국 경복궁 주변을 자전거로 즐기려면 인도를 이용하거나 위험을 무릅쓰고 도로로 달려야 한다. 안전을 위한 표지판이나 펜스도 없다. 서울시에서는 안전펜스를 설치하자는 안을 내놓았으나 문화재청은 이를 거부했다.

당장은 뾰족한 대책도 없다. 박정상 경복궁관리팀장은 “관광버스 기사들에게 외곽에 주차하도록 권유하는 것 이외에 자전거 도로를 지킬 수 있는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서울시 임대성 자전거시설1팀장은 “자전거 도로를 점거하는 차량 모두 단속 대상”이라면서도 “버스가 떠나가기를 잠시 기다렸다가 자전거를 타는 것이 방법”이라는 옹색한 답변을 내놓았다.

이에 대해 한국교통연구원 신희철 박사는 “자전거 이용 활성화를 위해 도심 자전거 도로를 건설하는 것이 필요하지만 효율적으로 되려면 연결도로망 등을 세밀하게 계획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임주리 기자, 사진=최승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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