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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궁연의 hot&pop] 찬바람이 불어요 재즈바가 불러요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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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면

오랜만에 서울 이태원에 있는 ‘올댓재즈(All That Jazz)’에 갔습니다. 33년째 그 자리에 있는 재즈 바죠. 그날은 류복성 선생님의 라이브가 한창이었습니다. 류 선생님은 한창때 이대 정문 옆에서 ‘봉고’라는 재즈 바를 운영하셨죠.

세월 탓인지 선생님의 머리색이 하얗게 바뀌었지만, 예나 지금이나 재즈 연주를 ‘토크쇼’ 형태로 진행하시는 모습은 여전합니다.

올댓재즈는 저의 첫 직장입니다. 1988년 11월, 지금은 제 아내가 된 당시 누나와 이태원에 있다는 김치볶음밥집을 찾아 길을 걷고 있었죠. 그땐 인터넷과 휴대전화가 없던 때라 가다가 공중전화나 전화가 있을 만한 카페나 약국을 찾아가 정보를 알려준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길을 되물으면서 목적지까지 가곤 했답니다. 그날도 역시 길을 못 찾아 친구에게 전화를 걸기 위해 어딘가 찾아들었습니다. 그곳이 올댓재즈였죠. 그 우연은 제 운명이 됐습니다.

아직도 기억이 생생합니다. 나는 전화기가 있기를 염원하며 들어갔는데, 멜로디와 화성이 일초 간격으로 무지개처럼 변하는 피아노 소리가 가슴을 확 뚫고 지나가는 거였습니다. 그 뚫린 가슴을 움켜잡고 무대를 보았습니다. 당시 서울대 음대 재학 중인, 재즈계의 신성으로 불렸던 이영경씨였습니다. 피아노라는 악기의 위대함을 깨닫게 된 순간이기도 했죠. 원래 어려서부터 어머니가 집에서 연주하시는 피아노 소리만 들으면 귀를 막았던 저였습니다. 보통 이럴 때 상투적으로 ‘멍~하게 그 자리에 그냥 서 있었다’는 표현을 쓰죠. 그런데 전 달랐습니다. 재즈의 룰을 모르는 저는 연주 중인 이영경씨에게 다가가 귀에 대고 소리쳤습니다.

최근 올댓재즈에 갔을 때 본 류복성씨 공연.

“저, 이런 음악을 같이 연주하고 싶습니다.”

거기서부터 나의 재즈 인생이 시작됐습니다. 올댓재즈는 엄격한 주인장 심사제도가 있습니다. 평일 영업시간 전 밴드 리허설이 있는데, 통과되면 가장 손님이 없는 월요일 밤 시간을 배정받아 45분 연주하고 15분 휴식하는 형태(이것을 1set라고 합니다)로 세 번 연주를 합니다. 재즈바의 연주자들은 요일 배정으로 우열이 갈리는데, 당시는 매주 일요일이 버클리 1세대 정성조 선생의 고정 스테이지였고, 다른 밴드들이 주말 시간을 놓고 각축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좋은 시간을 배정받는 데는 원칙이 있습니다. 첫째로 연주 실력이 좋을 것, 둘째로 많은 레퍼토리를 암기해 손님들이 신청곡을 청하면 연주할 것, 셋째로 좋은 분위기를 만들어 ‘매상’에 연결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어떤 이는 재즈음악 속에는 ‘노예의 역사’가 태생적으로 들어있다고 하기도 합니다.

평일 밴드도 감지덕지하던 중 지금의 ‘윈터플레이(Winter play)’ 리더인 이주한씨가 우리에게 합세했죠. 그는 외교관 자녀였고, 당시엔 드물게 플루겔혼을 연주했습니다. 그로부터 신세대 재즈밴드인 ‘R.S.V.P.’가 결성됩니다. 88년엔 일본의 거장 ‘조지 가와구치 밴드’와 감히 협연을 하게 되었고, 드디어 꿈에 그리던 주말 스테이지에 입성하게 됩니다. 주급이 무려 2만5000원. 자장면이 500원이었으니 정말 큰돈이었죠. 게다가 가끔 운이 좋아 펑크난 밴드타임을 메우면 5만원의 주급이 손에 들어왔죠. 제 연인인 누나에게 제법 근사한 저녁을 사주고, 헤어질 때 택시를 잡아주곤 기사님께 택시비를 먼저 드리면서 ‘거스름돈은 뒤의 손님에게 주세요’라며 남자의 자존심을 세울 수 있었답니다.

벌써 20년이 지났네요. 그래도 올댓재즈는 여전합니다. 이곳은 많은 야사도 간직하고 있습니다. ‘아브라카다브라’(브라운아이드걸즈 노래가 아니고 스티브밀러 밴드가 80년대 초에 발표한 곡)의 주인공 스티브 밀러가 몰래 한국에서 얼마간 살았는데 그때 올댓재즈에 와서 거의 살다시피했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어떤 베이시스트가 연주자들에게 동의를 얻어 스테이지에 올라와 즉흥 협연을 하고 갔는데, 알고보니 허비 핸콕 밴드의 베이시스트 폴 잭슨이었다는 등의 얘기죠.

날이 스산해집니다. 이럴 때 재즈를 한번 들어보세요. 재즈가 어려우시다고요? 그럴 때 올댓재즈에 한번 가보세요. 음악과 고독이 함께한다는 말이 무언지 알게 되실 겁니다. 지금은 꽤 먹을 만한 메뉴도 많아졌네요. ‘피자파이’를 꼭 맛보세요. 연주가 있는 날의 테이블차지는 5000원입니다.

재즈바에 잘 가는 법이 따로 있냐고요? 가기 전에 전화를 해서 “오늘은 어떤 연주자들이 나오느냐? 어떤 장르의 재즈를 연주하느냐?”하고 물어보는 정도면 됩니다. 사랑 고백을 하기 위해 무드를 잡으러 갔는데 ‘아프로큐반 스페셜’이면 곤란할 테니 말이죠.

남궁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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