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진혁칼럼] 털고 갈 1호 '개졸(皆卒)정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이제 사흘만 지나면 새 천년이다.

각계의 많은 사람들이 버릴 것은 버리고 털 것은 털고 가자고 말한다.

정치지도자들도 묵은 현안들을 털고 새 천년 새 정치를 하자고 다짐한다.

우리의 앞길을 가로막고 짜증과 비관만 주고 있는 갖가지 쓰레기 같은 정치현안들을 새 천년까지 끌고가선 안됨은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정치인들은 입으로는 새 정치를 말하면서도 실제 행동이나 발상엔 달라진 게 없다.

언론문건 파동이나 국정원 선거개입 의혹 같은 것은 그냥 깔아뭉개고 넘어갈 작정이고, 선거법 협상은 21세기가 마치 선거구제에 달린 것처럼 속보이는 논의만 하고 있다.

새 천년만 되면 그들이 하루아침에 성인군자가 되기라도 한다는 말인지 통 믿을 수가 없다.

저물어가는 20세기, 곧 마감할 1천년대의 이 세모(歲暮)를 울적하고 비관적인 분위기로 만드는 것이 곧 정치다.

경제는 회복됐다고 하고 실업자도 이젠 1백만명 밑으로 줄어들었다는데 정치는 아직도 거짓말과 정쟁과 꼼수와 잔꾀로 새 천년의 기대를 어둡게 하고 있다.

이런 점을 생각한다면 새 천년이 오기 전에 우리가 버리고 가야 할 우선순위 1호는 당연히 정치분야에 있다고 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정치에서 털어버려야 할 우선순위 1호는 뭘까.

필자가 보기에 그것은 '개졸(皆卒)정치' 다.

모든(皆)사람을 졸(卒)로 만드는 '개졸정치' 가 더 이상 새 천년에까지 가서는 안될 털어야 할 1호대상이다.

생각해보자. 우리 정치에서는 보스 1인을 제외하고는 거의 전원이 졸이다.

보스가 내각제다 하면 모조리 내각제를 복창(復唱)하고, 보스가 내각제 유보다 하면 모두가 내각제 유보라고 외친다.

보스가 신당(新黨)이다 하면 모두가 신당이 살 길이다 하고, 보스가 합당이다 하면 또 합당에 다 따라나선다.

일인지하 만인졸(一人之下 萬人卒)격이다.

보스가 하자는 대로 이리 몰리고 저리 쏠리는 만성적 뇌동(雷同)현상이 우리 정치를 지배해 왔다.

더러 반발이나 이견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 찻잔 속의 태풍일 뿐 결말은 보스에 대한 가부장적(家父長的) 의존으로 끝나고 만다.

이처럼 만인을 다 졸로 만들어버리는 이런 정치구조에서 정상적인 정치가 될리가 없다.

보스가 하자는 대로 따라만 가는 상황에서 무슨 지혜와 정책과 경륜이 결집되겠는가.

국회의원이나 당 간부가 수백명이지만 정치권엔 항상 몇몇 보스들의 의견뿐이다.

보스의 뜻을 받들어, 지침을 받아, 눈치를 보아 당론(黨論)이란 것이 결정되고 나머지는 거기에 따라갈 뿐이다.

정치권엔 실제 많은 인물이 있지만 이들이 지혜와 경륜을 발휘할 기회나 무대는 별로 없다.

보스를 추종하거나 그의 소도구 노릇을 하는데 그치기 십상이다.

정치권 밖에 있을 때엔 이름을 날리던 사람, 촉망과 기대를 받던 사람들도 정치권에 들어가고 나면 어디서 뭘 하는지 존재가 희미해진다.

자기다운 말이나 자기다운 정치를 못하는 것이다.

정치권을 '블랙홀' 이라고 하는 것도 그 까닭이다.

그러니까 개졸정치에서는 사람이 클 수가 없다.

보스의 신임을 받는 소수가 득세하고 실력자 소리를 듣기도 하지만 그들도 보스가 신임을 거두기만 하면 언제나 다시 졸이 되고만다.

본질이 졸이라는 데 변함이 없는 것이다.

소위 '눈도장' 을 찍으러 다니고, 과잉충성을 하고, 허위보고를 하는 정치행태가 왜 나오겠는가.

졸들이 보스에게 잘 보이고 그 눈에 들어야 그나마 출세하고 감투 하나라도 얻어쓸 수 있으니까 그런 것 아닌가.

그러니까 이런 개졸정치에서는 보스 주변에 저절로 인(人)의 장막이 생기고, 언로(言路)가 열렸느니 막혔느니 하는 시비가 끊일 새가 없는 것이다.

연례행사처럼 되풀이돼온 국회 날치기 같은 것은 전형적인 개졸정치의 산물이다.

의원들이 다 졸이요, '병력' 이 되니까 비민주적이요, 떳떳지 못한 날치기를 하는데도 일사불란하게 단상을 점거하고 의장석을 호위하는 '작전' 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구성원들이 졸이 아니라 개성과 주체성이 있고 제 몫과 제 역할이 있는 정치라면 우리 정치의 오랜 고질이 돼온 인치(人治)니, 1인의존 체제니, 독선.독주.독단이니 하는 말도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더욱 심각한 것은 개졸정치가 정치권 만 졸로 만든 것이 아니라 지역별로 국민까지 졸로 만들어 온 현상이다.

보스별로 심화되고 있는 지역주의를 보라.

이런 개졸정치를 새 천년, 21세기까지 끌고가야 할 것인가.

선거를 앞두고 다시 수많은 사람들이 정치권에 들어가려 하고 있다.

이 사람들이 다시 개졸정치의 '임무교대용 병력' 이 돼서야 되겠는가.

새 천년 새 정치를 말한다면 당연히 개졸정치 청산.탈졸(脫卒)선언부터 나와야 할 것이다.

송진혁 논설고문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