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홍구 칼럼

정책 우선순위 결단을 촉구하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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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일의 우선순위를 명확히 선택하는 것이 인생이나 기업이나 국가경영의 성패를 좌우하는 필요조건임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는 원칙이다. 오늘의 한국정치가 혼미하고 사회불안이 확산하는 것도 결국 국가적 과제의 우선순위가 불확실한 데서 비롯되고 있다. 무더위가 한풀 꺾이면서 여당을 비롯한 정치권에서도 국가정책의 우선순위에 대한 인식이 되살아나는 조짐이 보이기 시작한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 '경제 최우선'공감대 이미 형성

어느 국가, 어느 정부든 간에 하고 싶은 일, 펼쳐야 할 정책, 추구해야 하는 목표는 많고 복잡하게 마련이다. 그 하나하나의 장단점과 타당성 여부를 놓고 열띤 토론과 논쟁을 벌이는 것은 민주정치의 당연한 모습이다. 그러나 개별정책의 추진을 둘러싼 공방에 몰두한 나머지 여러 정책 사이의 우선순위를 명시하지 못하면 국가운영은 혼란에 빠지게 될 뿐이다. 오늘날 다수의 국민은 수도 이전이나 과거사 청산에 대해 그와 같은 정책이 나오게 된 배경을 나름대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정책들이 오늘의 상황에서 최우선 순위를 차지해야 하는가에 대하여는 심각한 회의를 품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현실적으로 지금의 최우선 당면과제는 우리 국가와 국민의 생존과 직결된 불확실한 경제상황의 극복이라는 과제에 대해 이미 공감대가 형성되었으며 따라서 이를 우회하려는 어떤 논리의 전개도 무책임한 술수로 치부될 뿐이다.

몇 개의 정책을 동시에 추진하려는 의지는 가능할지라도 그것이 정책들의 순위 결정에 우선할 수는 없다. 인생은 짧지만 나라와 민족의 운명은 길고 영원하다. 내가 못 다한 일은 다음 사람이 하면 되는 것이다. 많은 목표를 한꺼번에, 특히 한 임기 안에 달성하려는 과욕은 삼가는 것이 성공적 국가경영의 지혜다. 지금처럼 어수선한 시기에는 대다수 국민이 가장 시급하다고 생각하는 문제해결에 우선순위를 부여하고 국력을 집중시켜야한다.

경제문제에 최우선순위를 두자는 것은 단순히 불황의 극복만을 처방하자는 것은 아니다. 곳곳에서 '살기가 어렵다' '장사가 안 된다' 'IMF사태 때보다 더 힘들다' 등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접하고 있다. 또한 엄청난 숫자의 신용불량자와 청년실업자가 경제적 어려움을 반영하고 있다. 이러한 국민적 고통을 덜어주는 구급책과 우리 경제를 탄탄한 성장궤도로 진입시키는 촉진정책이 무엇보다 우선하여 집행되는 것을 국민은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단순히 불황의 극복에만 국정의 최우선순위를 부여해 발등의 불을 끄는 조건반사적 반응을 촉구하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10년, 30년, 50년 후의 미래를 내다보며 조국과 민족의 생존과 발전을 담보하는 장기전략을 모색할 때 내려지는 결론과 처방을 기대하는 것이다. 미래에 대비한 생존전략이 모호할 때 우리는 불안해질 수밖에 없다.

앞으로 세계시장에서의 국가 간 경쟁이 얼마나 치열할 것인가는 상상을 초월한다. 특히 중국이 최우선순위를 두고 노력하는 고도성장이 지속된다면 우리의 제조업시대는 마감되고 산업공동화의 위기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경제중심을 지식산업 및 서비스산업으로 옮기는 것도 결코 간단한 일은 아니다. 인구 10억의 인도가 얼마나 빠른 속도로 서비스분야에서 신장하고 있는지는 우리가 바로 눈앞에서 보고 있지 않는가. 한편 오랜 불황에서 빠져나오는 제2의 경제대국 일본도 구조개혁과 기술발전에 힘입어 새로운 도약을 자신있게 기획하고 있다. 이런 틈바구니에서 어떻게 우리의 경쟁력을 향상시켜 국가적 생존을 담보할 수 있느냐가 곧 경제를 최우선순위에 두어야 하는 자명한 상황의 논리다. 이렇듯 뻔한 선택을 눈앞에 두고도 정책의 우선순위를 둘러싼 혼선이 계속된다면 우리는 어두운 앞날을 자초하고 말 것이다.

*** 지식산업 대비 교육개혁도 시급

한마디로 우리의 경제는 생존을 건 경쟁에 대비한 획기적인 체질개선을 늦출 수 없는 시점에 서 있다. 창의력과 두뇌의 경쟁으로 승부가 가려질 지식산업에 대비한 교육개혁도 지체없이 추진해야 한다. 이 모든 것을 확실히 추진하기 위해서는 넓은 의미의 경제문제를 최우선시하는 정치적 결단이 선행돼야 하며 그러한 결단이야말로 국민의 광범위한 호응을 얻게 될 것이다.

이홍구 본사 고문.전 국무총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