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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영빈칼럼] 털 것은 털자, 그러나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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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올 한해 우리 사회를 혼란과 미궁으로 빠뜨린 두개의 중대사건이 언론장악음모 의혹과 옷 로비 의혹이었다.

옷 의혹은 국정조사와 특검수사를 거쳐 대체적 전모가 밝혀지고 있다.

그러나 중앙일보 사태와 연결돼 언론문건으로 확산된 언론장악음모 의혹은 옷 의혹에 파묻혀 여전히 미궁 속에 남아 있다.

세기말의 한해가 저물어 가고 있다.

버릴 것은 버리고 잊을 것은 잊으며 털 것은 활활 털어내야 한다.

그러나 털려야 털 수 없을 만큼 언론문건 의혹은 흐지부지 넘어가고 있다.

국정조사는 여전히 답보상태고 사태의 진상을 밝힐 어떤 추가 조사도 이뤄지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한 세기를 넘기는 미제(未濟)사건으로, 또는 한 신문사의 '자해극' 이나 한 부도덕한 기자의 일과성 해프닝으로 끝나게 돼 있다.

과연 이대로 넘어갈 수 있는가.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지난달 19일에 열렸던 중앙일보사태 관련 '새언론포럼' 의 주제발표자인 경향신문 강기석(姜琪錫)부국장의 발표 내용을 요약해보자. 그는 언론계 종사자들의 추론을 빌려 두개의 가설을 내놓고 있다.

가설1. DJ정권이 언론장악을 시도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음모라인의 하나가 국정원장을 지낸 이종찬 부총재고 그 참모 중 하나가 문일현 기자다.

문일현 보고서는 어떤 비중으로든 현정부의 대언론정책에 응용돼 보광 탈세수사-중앙일보 탄압-전체 언론장악으로 진행됐을 가능성이 크다.

가설2. DJ정권이 언론대책을 세웠겠지만 장악음모까진 가지 않았을 것이다.

언론문제에 관심있는 李부총재가 사석에서 고민을 털어놓자 文기자가 스스로 나서 평소 생각을 정리해 개인적 차원에서 보내준 것이다.

문건을 李부총재가 봤든 못봤든 대권을 꿈꾸는 한 정치인의 호기심으로 치부할 수 있다.

언론장악음모를 증명하려면 그 이상의 증거, 예컨대 관계기관장 회의나 발언록이 있어야 한다.

두개의 가설은 중앙사태와 언론문건 의혹의 연관성을 가장 잘 정리한 추론이라고 나는 본다.

여기서 우리가 따져야 할 대목이 무엇인가.

첫째가 권력과 언론간의 관계설정이다.

가설1이든 2든 권력이 언론을 장악하려는 의도가 분명히 있었기에 중앙사태와 문건작성이 이뤄진 것이다.

적극적이냐 소극적이냐, 정권 차원이냐 개인 차원이냐가 문제의 핵심이다.

이것을 국정조사에서 따져야 한다.

둘째가 언론과 언론간의 관계문제다.

중앙사태 발생 후 타언론사의 대응태도다.

결코 어느 편을 들지 않고 둘의 약화를 초래하는 싸움을 즐긴다는 姜부국장의 지적이 있듯 강건너 불보듯 했던 언론사간의 죽기 살기식 경쟁풍토다.

셋째가 그렇다면 우리 언론사 내부엔 문제가 없었느냐는 자성(自省)이다.

털 것은 먼저 털자. 우선 자성부터 해야 한다.

덮어두면 관행이지만 밝혀지면 탈법이 되는 탈세행위에 대해선 사주 자신이 이미 정중한 사과를 했고 법의 대가까지 치렀다.

언론사주의 타기업 경영은 지난 세기의 유산으로 끝내야 한다.

왜 탄압받을 당시엔 말이 없다가 사장이 구속되자 폭로시리즈를 내느냐는 비난 또한 겸허히 받아들여야 한다.

이젠 권력의 인사.기사 개입이 있을 그때마다 폭로하고 그때마다 감연히 맞서는 용기를 언론사들이 공유해야 할 것이다.

그럼 무얼 고쳐야 할 것인가.

권력과 언론간의 관계설정을 새롭게 해야 한다.

언론사의 재정적 약점을 빌미로 정권이 언론에 개입하고 장악하려는 어떤 시도도 새 천년부터는 사라져야 한다.

이를 위해 해가 저물기 전에 국정조사를 실시해 진상을 밝히는 작업을 벌여야 한다.

기사개입.인사개입이 있었다면 당사자는 사과하고 합당한 문책을 받아야 한다.

언론장악음모의 실체가 어떤 형태인지 밝혀내는 절차가 없고서는 권력은 언론을 장악하려는 유혹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 유혹을 끊는 뒤풀이가 국정조사여야 한다.

권력과 언론은 '적대적 원한관계' 가 아니다.

'건강한 긴장관계' 를 얼마나 잘 유지하느냐에 따라 권력과 언론이 민주사회를 발전시키는 상생적 역할을 할 수 있다.

새로운 관계설정의 전기(轉機)가 있어야 한다.

중앙사태 발생 후 나는 '순망치한(脣亡齒寒)' 의 언론연대를 제안한 적이 있다.

입술이 망가지면 잇몸이 시리다, 중앙사태는 한 신문사만의 탄압이 아니라 언론사 전체의 탄압일 수 있으니 연대해 맞서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탄압은 무슨 탄압, 너희가 언제 탄압을 받았다고 자유언론을 외치느냐는 냉소적 대응밖에 없었다.

언론 현실은 순망치한론보다는 '양호유환론(養虎遺患論)' 이 우세했다.

호랑이를 길러 화를 남기기보다는 나의 적이 호랑이에 먹혀가기를 바라는 비열한 경쟁풍토였다.

버려야 할 언론풍토다.

민주사회 구현을 위한 순망치한의 연대가 다음 세기에도 절실한 우리 언론인들의 과제다.

권영빈 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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