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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국회의 또 다른 직무유기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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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소모적인 정쟁으로 국민의 지탄을 받고 있는 국회가 헌법정신을 훼손하는 또 하나의 사건을 벌였다.

국회 법사위에서 민법 개정안의 심의를 마치면서 이미 2년5개월 전에 목숨이 끊어진 법조문인 동성동본금혼조항을 개정되는 민법에서도 그냥 놔두기로 의결한 것이다.

성과 본이 같으면 아무리 먼 친척간이라도 혼인할 수 없다는 동성동본금혼조항이 남녀평등에 반하고 인간으로서의 행복추구권을 침해하는 것임은 이미 97년 7월 헌법재판소가 천명한 바 있다.

그런데 헌법재판소는 이 조항에 대해 위헌을 선언하면서 '입법부가 98년까지 개정하지 않을 경우 99년 1월부터 동 조항은 효력을 상실한다' 는 단서를 달았다.

이것이 헌법불합치결정이다.

헌법불합치결정은 문제가 되는 조항이 헌법을 위반한 것이기에 즉시 효력이 상실돼야 함이 마땅하나, 헌법재판소에서 바로 효력을 상실케 하지 않고, 기간을 두어 관련된 국가기관에서 직접 그 위헌요소를 제거할 기회를 준다는 뜻이다.

그럼으로써 즉각적인 법의 효력상실로 인한 사회혼란을 막고 현실과의 타협 여지를 두는 것이다.

헌법은 주권자인 국민의 총의를 담은 으뜸법이다.

따라서 헌법해석에 관한 최고기관인 헌법재판소 결정은 그대로 모든 국가기관을 기속(羈束)한다.

모든 국가기관은 헌법재판소의 결정에 따라 법과 제도를 고치고 시행해야 할 의무를 지고 있다.

그 의무는 법적 의무다.

따라서 국회는 그 즉시 민법의 개정에 착수해 99년 1월 이전에 위헌선언을 받은 조항을 폐지하고, 새로이 금혼의 범위를 정하는 조항을 만들어야 했다.

그러나 국회는 헌법재판소가 정한 시한까지 아무런 일을 하지 않았다.

그 결과 이 조항은 99년 1월이 됨으로써 효력을 잃게 됐으나, 국회의 직무유기 때문에 동성동본 부부들은 헌법재판소 결정 이후에도 적지 않은 혼란을 겪어야 했다.

다행히 실무를 맡고 있는 법원에서 예규를 만들어 동성동본 부부의 혼인신고를 처리해 왔지만, 사망선고를 받은 이 조항은 그 뒤에도 흉물스럽게 민법의 한 귀퉁이를 차지해 왔던 것이다.

그러다가 정부에서 이번에 민법개정안에 8촌 이내 혈족과 6촌 이내 인척의 결혼을 금지하는 것으로 고쳐 제출하자, 법사위 위원들은 심사숙고(□)끝에 정부의 안을 버리고 기존의 동성동본금혼조항을 그대로 존치시키는 것으로 결정한 것이다.

법사위에서는 자신들의 이런 결정에 대해 '보다 폭넓은 각계각층의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 는 핑계를 댔다고 한다.

이미 지난 2년5개월 동안 국회는 국민의 의견을 충분히 수렴할 기회를 갖고 있었고, 실제로 공청회를 열어 의견수렴절차도 가진 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합의' 를 들먹이는 것은 국회가 다음 총선에서 떨어질 '표' 만을 바라보고 있으며, 국회의 신성한 의무에 대해서는 전혀 아무런 생각도 없다는 것을 스스로 명백히 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내용으로 금혼조항이 개정돼야 할 것인지에 대한 사회적 합의와 바람직한 기준은 국회의 변명과는 달리 이미 나와 있다.

유전학적으로 8촌을 넘어가는 경우의 근교계수(近交係數), 즉 조상으로부터 같은 유전자를 물려받는 비율을 표시한 수치는 일반적으로 집단내에서 행해지는 근교계수와 유사하다고 한다.

즉 8촌을 넘어가면, 열성유전자나 유전적 요인에 의한 질병을 타고 날 확률이 동성동본이나 그렇지 않은 경우나 비슷하다는 것이다.

선진 외국의 경우를 보더라도 대부분 8촌을 넘지 않는 범위내에서의 혼인을 금하고 있다.

법원은 이미 동성동본의 혼인신고를 수리하고 있는데, 그 기준은 현행 가족법상으로 무효혼의 기준을 이루는 8촌 이내의 방계혈족이 되고 있다.

따라서 어느 면으로 살피든지 정부에서 정한 안이 가장 합리적임이 밝혀져 있는 상태다.

이번 결정으로 수십만쌍이 넘는 동성동본 부부들뿐만 아니라 국민 다수가 국회에 대해 분노하고 있다.

여성국회의원들은 정부안을 다시 살리는 수정안을 독자적으로 제출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고, 헌법재판소는 개정법률에서도 위헌조항이 여전히 살아 있는 초유의 사태에 따른 혼란을 염려해 동 조항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시 무효라는 점을 주지시키고 나섰다.

국회의 한심한 행태가 빚어내는 국가손실이다.

지금이라도 국회는 헌법재판소의 뜻을 존중하는 내용으로 민법을 개정해야 한다.

거듭 말하거니와 이것은 국회의 재량이 아니라 의무다.

정연순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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