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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서울 시간여행] 1. 압구정동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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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수도 서울의 20세기는 어떤 모습으로 기억될까. 서울의 거리와 동네는 우리 시대의 보람과 아픔, 허영과 실속, 삶과 문화를 보여주는 거울이기도 하다.

압구정동 로데오 거리.봉천동 달동네.구로공단.동대문 첨단패션 상가.난지도 생태공원. 새 천년을 앞두고 우리 삶의 공간이 변화해온 모습을 더듬으며 서울의 시간여행을 떠나본다.

70년대 초반만 해도 허허벌판이던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일대. 이제는 한국의 문화.패션.음식 등의 유행을 선도하는 '문화첨병' 지대로 자리잡았다.

부의 상징으로 꼽히는 고층 대형 아파트, 부동산 투기로 떼돈을 번 '졸부신화' , 향락.소비문화의 대명사 '오렌지족' 등. 압구정동은 고도 경제성장 속에 진행된 서울의 급속한 개발과 그 사회문화적 부산물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 허허벌판이 아파트촌으로〓압구정동이 개발되기 시작한 것은 70년대 초반. 현대건설은 지난 70년 4월 압구정동(당시 성동구)366~371번지 일대 4만8천여평의 공유수면 매립공사를 시작했다.

현대아파트 23개동 1천5백62가구가 이곳에 건립됐다. 이와함께 영동2지구 구획정리 사업이 진행되면서 압구정을 비롯한 강남지역이 거대 규모로 개발되기 시작했다.

현재 강남구에는 1백20여개의 아파트 단지가 있다.대모산이나 구룡산에서 내려다보면 강남구는 온통 아파트 숲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대아파트는 당시로선 초고층인 12층에 승강기와 현대식 입식부엌이 설치되고 난방이 중앙집중식인 등 주거생활을 혁신적으로 바꾸는 계기가 됐다.

도시계획전문가 강병기(康炳基.구미1대학 학장)교수는 "강남개발은 서울의 도시계획에서 획기적인 한 획을 긋는 대역사이며 우리 아파트 문화확산에 불을 당긴 도화선이 됐다" 고 평가했다.

현대아파트 80평 짜리는 지금 외환위기 이전의 시가를 회복, 16억원을 호가하면서 여전히 부(富)의 상징이 되고 있다.

◇ '복부인' 과 '오렌지족' 〓압구정동으로 대변되는 아파트 건설붐은 강남 땅투기와 '복부인' 을 탄생시켰다.

70년대 후반 부동산 경기가 과열되면서 투기가 횡행했고 아파트 단지 주변에는 토지 투기꾼인 '복부인' 들로 득실댔다.이로인한 '졸부 탄생' 은 80년대 후반의 '오렌지족' 탄생과 무관하지 않다.

부모가 쉽게 번 돈을 마구 써대는 새로운 소비계층이 생겨난 것. 상대적으로 좁은 면적에 밀집된 아파트 인구가 구매력까지 갖추다 보니 상가가 집중적으로 들어섰다.

여기에 최첨단 살롱.까페 등이 확산되면서 압구정 일대는 유행의 첨단지역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압구정을 대변하는 대명사가 되버린 '오렌지족' 의 등장은 10.20대 젊은 층이 강력한 소비계층으로 부각되는 신호탄이었다.

할리웃을 본 딴 '로데오' 라는 거리 이름도 외국 문화가 본격적으로 유입되기 시작한 당시 풍조를 대변한다.

◇ 압구정동에 가면 유행이 보인다〓유행을 이끄는 압구정동에서는 '길거리 간식' 까지 첨단이다. 요즘 압구정동에선 꿀과 엿기름을 섞어 만든 덩어리를 땅콩.잣.깨 등을 넣고 돌려만 '꿀타래' 가 유행이다.

수첩과 연필 한자루도 전문가가 직접 디자인한 이색적인 것이 아니면 눈길을 끌지 못한다.

동서양 재료와 조리법이 '융합' 된 음식 '퓨전푸드' 는 최근 압구정과 주변 청담동 젊은이의 화두다. 새로운 것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성향이 강하고 다양한 욕구를 한꺼번에 충족하고 싶은 신세대의 취향에 맞아떨어진 것.

이곳에선 떠들썩한 파티를 밤새 벌이는 테크노 클럽이 이미 유행 중이다.CD수준의 뛰어난 음질을 자랑하는 첨단 컴퓨터 음악파일인 MP3를 이용하는 가요제도 국내 최초로 이곳에서 열릴 예정이다.

이곳의 상인들은 "패션이건 음식이건 주력 소비군단인 최고급층의 구미에 맞춰야 살아남을 수 있다" 고 입을 모은다.

이같은 문화에 대해 비평가들은 혹평을 서슴치 않는다.문화평론가 김지룡씨는 "신촌 등이 운동적 성격을 띤 대안문화을 창출한다면 압구정동은 돈으로 차별성을 얻어내는 곳" 이라며 "압구정 문화는 생산성을 얻지 못하는 일과성 문화에 불과하다" 고 비판했다.

20세기를 마감하는 요즘 압구정은 앞만보고 달려온 한국과 서울의 '문화적 정체성' 에대한 의문을 새삼 떠올리게 한다.

문경란.성시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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