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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천년 도전 현장-유럽] 12. '유럽합중국' 美에 맞선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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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새 천년의 문턱에서 바라본 베를린은 아직 유럽의 변방이다.

동쪽으로 90㎞만 가면 폴란드와의 경계인 오데르강이 나오고 유럽연합(EU)은 거기서 멈춘다.

오데르 강변의 독일쪽 국경도시인 프랑크푸르트 오데르. 검문소가 설치된 다리 하나 사이로 폴란드쪽 접경도시인 수비체와 마주보고 있다.

강만 넘으면 모든 게 반값이다.

독일에서 1ℓ에 1.8마르크(1마르크〓약 6백원)인 휘발유가 폴란드에서는 0.9마르크이고, 한갑에 5마르크인 담배는 2.2마르크다.

저녁시간이면 강을 건너온 독일인들로 인구 2만명에 불과한 수비체의 술집과 담배가게.주유소는 흥청댄다.

이곳에는 독일 마르크화가 그대로 통용된다.

프랑크푸르트 오데르에 있는 유로파대학 국제경영학 교수인 제프리 커리(47)박사는 21세기 들어 유럽에서 가장 큰 변화를 겪게 될 지역으로 독일-폴란드 접경지대인 오데르강과 나이세강 유역을 꼽았다.

장차 폴란드가 EU권(圈)에 편입돼 자본.사람.상품이 본격적으로 오가게 되면 이곳은 동.서유럽을 잇는 '골드웨이(황금로)' 의 요충지가 될 것이라는 것이다.

"유럽의 21세기는 오데르-나이세강 너머에 있다" 고 베를린에서 발행되는 일간지 타게스슈피겔의 게르트 아펜첼러 편집국장은 단언했다.

유럽분단의 상징이었던 오데르-나이세강 너머로 번영과 안전의 상징인 EU를 확장시켜 나가는 것이 21세기 유럽의 불가피한 선택이라는 주장이다.

바르샤바에서 발행되는 영자 주간지 바르샤바 보이스의 안제이 요나스 편집장은 폴란드의 처지를 "추운 겨울 문밖에서 떨고 있는 사람" 에 비유하며 "열심히 두드려도 문은 좀처럼 열리지 않고 있다" 며 EU의 미지근한 회원국 확대정책에 불만을 나타냈다.

하지만 EU의 기존 회원국들은 가입을 기다리는 국가들을 독감환자로 보고 있다.

무턱대고 문을 열어줬다가 안에 있던 사람이 독감에 옮을 수 있고, 그렇게 되면 집에서 뛰쳐나가겠다는 사람이 생길 수도 있다는 것이다.

EU의 파국 시나리오다.

파리정치대학(IEP)의 필립 모로 드파르주 교수는 "가입 희망국들의 인구는 EU의 30%나 되지만 국내총생산(GDP)규모는 7% 수준" 이라며 "향후 10~20년간 EU의 최대 과제는 새 회원국들의 '연착륙' " 이라고 말했다.

지난 10~11일의 헬싱키 정상회담에서 EU 15개 회원국은 이미 가입협상을 진행 중인 폴란드.헝가리.체코.슬로베니아.에스토니아.키프로스의 6개국 외에 루마니아.불가리아.슬로바키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몰타 등 6개국과의 가입협상을 내년 2월부터 시작키로 했다.

이와 함께 회원국 확대에 대비한 내부 기구정비와 의사결정방식 개선을 위한 정부간 회의(IGC)를 내년말까지 완료, 2002년말까지 암스테르담조약 개정안에 대한 비준절차를 끝내기로 했다.

적어도 그때까지는 새 회원국을 맞을 준비를 완료한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가입대상국인 12개국은 이르면 2003년부터 EU 회원국이 될 수 있지만 12개국이 다 가입

하려면 2010년까지는 기다려야 할 것이라는 전망이 유력하다.

독감이 나으려면 적어도 그 정도 시간은 필요하다는 것이다.

경제면에서 유럽은 규모만 놓고 보면 미국을 능가한다.

하지만 군사적으로는 난쟁이다.

미국의 도움이 없으면 아무 것도 못하는 미숙아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코소보 사태에서 입증됐다.

군사적 홀로서기는 21세기 유럽의 최대 과제다.

그래야만 정치적으로 미국과 대등한 목소리를 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헬싱키 정상회담에서 EU 회원국들이 2003년까지 5만~6만명 규모의 병력을 분쟁지역에 신속하게 파견할 수 있는 독자적 동원능력을 갖추기로 한 것은 역사적 결정이다.

유럽신속대응군은 미국 손아귀에 있는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에 상치되는 것이 아니라 보완적 기능을 갖게 된다고 유럽은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먼 훗날 유럽공동방위군의 모태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 크다.

프랑스 국방고등연구소(IHED)의 장 마리 게앙노 소장은 "주권의 3요소는 통화.시장.군대" 라면서 "단일시장과 단일통화는 20세기에 이미 완성됐고 남은 것은 독자방위뿐" 이라고 지적한다.

돈.시장.군대의 3박자 통합이 21세기 유럽의 비전이라는 것이다.

EU는 터키에도 가입 문호를 열어주기로 했다.

영토의 90%가 아시아지역에 걸쳐 있는 이슬람국가가 기독교권인 EU의 회원국이 될 경우 유럽은 정체성 문제에 봉착하지 않을 수 없다.

21세기 EU의 경계선이 과연 어디서 멈출 것인지, 통합의 최종 형태가 미국식의 연방체가 될지, 아니면 독립국가연합(CIS)식의 연맹체가 될지는 미지수다.

그런 점에서 EU를 '미확인 정치물체(OPNI)' 로 규정한 자크 들로르 EU 전 집행위원장의 정의는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이 새 천년을 앞두고 프랑스 국제관계연구소(IFRI)가 발간한 '람세스 2000 보고서' 의 결론이다.

베를린=배명복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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