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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591. 아라리난장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7면

제13장 희망캐기 26

이튿날 새벽의 분위기는 침통했다.일행이 잠자리에서 일어난 것은 조업나갈 어선들이 출어하는 시각과 맞물려 있었다.모두들 세수하고 서문식당 안방에 모여앉았다.박봉환이가 보자기 하나를 꺼내놓았다.그제서야 승희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보자기 속에 보인 것은 평소 태호가 입었던 헌옷 몇 가지들이었다.박봉환은 가위를 꺼내어 자신의 머리 한줌을 싹둑 잘랐다.잘라낸 머리채를 보자기에 담았다.손달근과 방극섭, 그리고 배완호와 두 아내들까지 차례로 머리를 잘랐다.

침묵 속에서 진행되고 있는 낯선 의식에서 승희는 비로소 태호가 유명을 달리한 사람이란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들은 지금 태호를 위한 의식을 치르고 있다는 것도 알았다.그들은 진작 알고 있었던 태호의 죽음을 이제야 깨닫게 되다니.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으나 눈물은 나지 않았다.그의 죽음을 현실로 받아들일 아무런 근거도 그녀에겐 없었다.그러나 방안에 감돌고 있는 비통하고 침울한 시선들이 승희를 겨냥한 채 움직일 줄 몰랐다.비로소 가위를 건네받았다.그리고 남들이 그랬던 것처럼 머리를 잘라 보자기에 담을 수밖에 없었다.

"태호를 무사히 저승으로 보내는데, 이승에 남아있는 우리가 할 수 있는 보은은 이것밖에 없당게. 우리도 태호와 저승까지 동행해 주는 뜻이 담겨 있는 게지라. 그런디 안동 권씨네 가문에는 이런 야그가 전해오고 있어라. 권씨 집안의 선비가 장원급제하여 전라도 어느 산협 고을에 관원으로 부임해서 선정을 베풀었지 않것소이. 그런디 이분이 고을 백성들로부터 선관으로 인심을 얻긴 얻었는디, 어느날 덜컥 병을 얻어 자리보전하게 되뿌렀소. 고을의 백성들이 이분의 생명을 살려내려고 백방으로 애를 끓였으나, 정성이 부족했던지 결국은 허사가 되고 말았부렀소.애통하기 그지없었던 고을 사람들은 선관을 머나먼 타관에서 장례를 치르게 할 수는 없다는 생각에서 송장을 울러메고 전라도 땅에서 경상도 안동까지 천리가 넘는 길을 시신을 운구해 주기로 결심하고, 상두꾼들을 불러모았지라. 너도 나도 자원을 했어라. 그런디 천리길을 달려온 날송장을 넘겨받은 그 댁의 형편을 살펴보니 운구해온 상두꾼들 끼니조차 대접을 할 수 없는 애옥살이로 견디고 있더란 말씀이지라. 집안 어디를 살펴보아도 곡식가마 쌓아둔 꼴은 보이지 않고, 방에 들어가도 사방의 벽조차 혓바닥으로 핥아놓은 듯 횅댕그렁하였고, 마당에는 닭 한 마리조차 키우지 못하는 비길데 없는 가난뱅이였지라. 오히려 운구해간 상두꾼들이 딱할 지경이었어라. 사정이 딱했으니 천리길을 운구해 줘서 집안에서 장례를 치르게 만들어준 사람들을 끼니 대접조차 할 수 없는 그댁 젊은 마나님의 심정은 어떠했겠습니까. 상두꾼들을 빈 입으로 돌려보낼 수밖에 없었던 그댁 마나님은 생각 끝에 머리채를 잘랐어라. 가진 것이라곤 그것밖에 없었겠지요이. 그리고 그 머리채를 가지고 며칠 밤을 도와 집신을 삼았더란 말이오. 그때 송장을 메고 찾아왔던 상두꾼들의 은혜를 보답하기 위한 것이지요이. 그 집신을 사람을 시켜 전라도 남편의 부임지로 보냈지 않겠어라. 전라도에서 받고 보니 여상주가 신발차 대신 머리채를 잘라 집신을 삼아 보냈지요이. 그런디 어떻게 그 애끓는 물건을 받을 수 있었겠소이. 도저히 받을 수 없다고 생각한 상두꾼들이 그 짚신을 다시 안동 권씨댁으로 돌려보냈더란 말이오. "

보자기를 챙겨든 박봉환이가 벌떡 일어서자 모두 뒤따라 일어섰다.엎어지면 코 닿을 자리에 선착장이 있었다.선착장은 벌써 출어를 앞둔 어선들이 북적거리고 있었다.새벽바람은 싸늘했으나 아무도 춥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작은 채낚기어선 한 척이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배는 손달근이가 몰았다.배가 바다 가운데로 나가 백사장 포구가 멀리로 사라지는 순간, 좁은 선실에 쪼그리고 앉았던 승희는 비로소 참았던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그러나 배는 사뭇 시꺼먼 바다 가운데로 미끄러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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