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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희 대기자의 투데이] 한반도 평화의 대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북한과 일본의 관계정상화 길에는 장애물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나라가 1992년 이래 동면상태에 들어가 있는 국교 정상화 교섭을 올해 안에 되살려내기로 합의한 것은 환영할 일이다.

북한은 지난 5년 이상 어려운 경제사정으로 축소에 축소를 거듭해온 대외관계를 복원하는 일에 많은 노력을 쏟아왔다.

유럽연합(EU)을 상대로 한 외교노력의 결과 이탈리아와의 수교가 임박했다. 필리핀.호주와의 수교 교섭도 진전을 보이고 있다. 북한의 이런 국제화는 궁극적으론 동북아시아 긴장 완화에도 플러스가 될 것이다.

미국이 페리보고서를 통해 북한은 붕괴유도 대상이 아니라 평화공존의 대상이라는 입장을 공식화한 것은 김정일(金正日)외교의 큰 업적이라고 하겠다. 그것은 법적.정치적 통일을 유보하고 남북이 한반도에 평화부터 정착시키자는 한국의 대북정책 기조를 반영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북한은 상당한 자신감을 얻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북.일 수교 교섭은 이런 큰 바탕색 위에 그리는 그림이다.

북한과의 수교 교섭을 다시 시작하기로 한 일본의 동기도 페리보고서에 압축된 한.미.일의 포괄적인 대북 관계개선 방안과 무관하지 않다.

일본은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의 햇볕정책과 미국의 페리보고서를 평양행의 청신호로 받아들였다. 지난해 여름 북한의 대포동 미사일 시험발사로 크게 충격을 받았던 일본이지만 북한의 외부지향 분위기가 고조된 기회를 놓치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평양행 버스를 놓치면 일본은 동북아시아의 긴장완화에 일본의 국력과 이해에 합당한 기여를 하지 못할 뿐 아니라 북한의 미사일 위협에서 벗어날 기회도 놓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일본은 북한과의 관계는 개선되지 않은 채 경수로 건설 분담금만 내는 처지가 될 수도 있다.

북.일 수교에는 두 개의 큰 장애물이 있다. 북한 미사일과 납북 일본인들의 문제다.

일본인들에게 북한의 대포동 미사일은 악몽같은 존재다.

게이오(慶應)대학의 오코노기 마사오(小此木政夫)교수는 일본이 일본을 미사일로 위협하는 나라와 어떻게 관계를 정상화할 수 있겠느냐는 논리를 가지고 북한 미사일을 사정거리 3백~5백㎞로 제한할 것을 요구할 것이라고 전망한다.

북한에 제시되는 당근은 조총련 측에서 50억~1백억달러로 추산하는 대북 배상금이다.

70년대 중반 해안지역에서 실종된 10명의 일본인 중에는 어린 여중생이 포함돼 있어 일본 여론상 북.일 수교가 비켜갈 수 없게 하는 문제다. 납북 일본인 문제의 논의는 수교 교섭과 별도로 진행되다가 '출구' 에서 만나는 방식이 될 것으로 보인다.

오코노기 교수는 대북 배상금이 50억~1백억달러가 된다고 해도 그것이 현금으로 한꺼번에 제공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일본 경제에 큰 부담이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한국의 고위 당국자는 일본의 대북 배상금이 북한 경제에서 차지할 비중을 고려하면 프로젝트 선정은 남북한 경제 모두를 시야에 두는 것이라야 한다고 말했다.

제조업이나 서비스업에 대한 중복 투자를 피하고 사회 기반시설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는 말로 들린다.

이 대목이 한국의 딜레마다. 북.일 수교를 환영하면서도 남북 관계 개선과의 시차에 여전히 신경을 쓰고, 특히 일본의 대북 배상금을 어디에 쓰는가에 대해서는 '충분한 협의' 를 기대한다. 자칫 과거와 같이 한국이 북.일 관계 개선의 걸림돌이 될까 걱정된다.

우리 대북정책의 1차적 목표는 한반도에서의 전쟁 방지와 평화정착이다. 북.일 수교로 상징되는 북한의 '국제화' 는 우리가 바라는 북한의 군사적인 모험주의 탈피에 획기적인 계기가 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정부가 여론 눈치 안보고 햇볕정책의 노선대로 북한의 외교공간 확대를 과감하게 수용하는 것은 평화를 위해 치르는 합당한 대가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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