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론

미국 대선 관전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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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4년 더'를 외치며 완고하고 강경한 이미지를 탈피하기 위해 '온정적 보수'를 표방한 부시 대통령의 재선 가도를 위한 미국 공화당 전당대회가 9.11테러의 현장인 뉴욕에서 열렸다. 이로써 미국의 대선 레이스는 '부시냐, 케리냐'의 선택을 놓고 마지막 코너를 돌고 있다. 이번 선거는 국내문제들보다 전쟁.테러.국가안보 등의 매우 무거운 대외정책의 주제들이 주요 쟁점이 돼왔다. 그러나 여전히 미 경제에 대한 성적표가 변수로 남아 있다. 또한 박빙의 레이스에서 공화.민주 양당 지지자들 사이의 '미국판 남남갈등'도 이번 선거의 주요한 특징 중 하나다.

세계 여러 나라의 주된 관심은 제국적 힘을 가진 미국의 일방주의가 이번 대선의 결과로 어떻게 그 성격과 내용이 변할 것이냐 하는 점이다. 한국의 입장에서 이번 미 대선은 본질적으로 변화하고 있는 한.미관계에서 볼 때 그 어느 때보다도 의미가 크다. '부시가 재선되면, 또는 케리가 되면'하는 가정 속에 한.미관계의 향후 방향에 대해 많은 예측과 희망 섞인 전망들이 나오고 있지만 결론은 큰 차이가 없을 거라는 점이다. 다만 큰 변화를 겪고 있는 주한미군 재배치와 감축 문제에 대해서는 케리 후보 쪽이 좀더 전통적 한.미동맹 관계를 강조하는 것 같다. 따라서 케리가 되면 주한미군 감축문제는 영향을 받을 가능성이 크다.

북한 핵문제에 대해서는 두 후보 사이에 전술적.기능적 차이는 있을지언정 본질적 차이는 없다. 케리가 당선되더라도 미국의 대북정책이 지난 클린턴 행정부가 멈췄던 자리에서 그대로 다시 시작되지는 않을 것이다. 북한의 핵 프로그램이 그 당시보다 훨씬 진전됐다. 농축우라늄 문제는 케리 후보의 입장에서도 간과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북.미 대화가 좀더 강조되겠지만 기존의 6자회담을 일거에 무용화해서 새로운 회담 방식을 끌어내는 것이 용이하지 않다.

기능적으로 보면 케리가 당선되면 새로운 대북정책 수립을 위한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적어도 그 기간에 북한 핵 문제는 공전할 가능성이 크다. 부시가 되면 북한 핵 문제는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매우 빠른 속도로 진행될 것이다.

그러나 케리든 부시든 한.미 간에는 현재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시각차가 존재하고 있다. 첫째, 대북경협의 속도다. 미국은 속도 조절을, 한국은 가속을 원하고 있다. 둘째, 북한 인권문제다. 미 의회에서는 북한 인권문제에 대해 결의안까지 낸 상태다. 한국의 여당 일각에서 북한보다 미국이 한반도 안보불안의 주범이라는 인식하에 이를 반대하는 서명운동까지 나오고 있다. 셋째, 남북 정상회담 추진이다. 우리 정부는 부인하고 있지만 이에 대한 소문이 계속 흘러나오고 있다. 미국은 표면적으로는 언급을 자제하고 있지만 한.미 간의 긴밀한 사전 협의 없이, 그것도 미국이 대선에 정신을 놓고 있을 때 이것이 이뤄진다면 한.미관계에 심각한 후유증을 남길 것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북한 핵문제로 시작된 한.미관계의 균열 속에 이 문제들에 대한 심각한 고려 없이는 '부시냐 케리냐'는 부질없는 질문이다.

더욱이 '부시냐 케리냐'의 선택은 4년의 여정에 대한 것이지만 유일 초강대국으로서 미국의 여정은 이보다 훨씬 길 것이다. 그 때문에 질문은 당연히 '미국이냐 아니냐'여야 한다. 한.미관계의 미래도 그러한 미국의 세기하에 놓여 있다. 남북관계도 물론 이것의 종속변수다. 정말 바라고 싶지는 않지만 냉정하게 말하면, 지금처럼 변화무쌍한 동북아의 상황 속에서, 우리는 그야말로 북한과 둘이서 초라하게 남는 동북아의 변방국가가 되는 길을 선택하고 있지나 않은지 심각하게 자성해야 할 것이다. 이에 대해 지금 국정을 책임지고 있는 정부와 집권여당은 어떠한 장기적 비전과 전략을 가지고 있는지 국민에게 구체적으로 보여줘야 할 의무가 있다.

현인택 고려대 교수.일민국제관계연구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