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포커스] 노근리- 고엽제- 서경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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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지난 가을 이후 우리는 지금까지의 관행으로 볼 때 결코 익숙하다 할 수 없는 세 사건을 경험했다. 노근리 사건.고엽제 후유증.서경원 발언 파문은 발생시기나 원인.배경 등에서 제 각각인 사건이었다.

노근리 사건은 미국의 통신사인 AP에 의해 추적 보도된 6.25때의 사건이었고, 고엽제 후유증은 발생 자체는 60년대 말이었으나 노근리에 뒤이어 문제가 부각된 사건이고, 서경원사건은 89년 일인데 요즘 다시 논란이 되고 있다.

하나는 양민학살의 문제요, 다른 하나는 환경.건강의 문제요, 또 하나는 간첩사건이었으니 완전히 별개의 사건이라 할 수 있다.

반면 이번 세 사건들은 공통점도 갖고 있다. 세 사건은 남북의 분단이라는 현실과 연관돼 있고 우리의 우방인 미국, 또는 적(敵)인 북한의 입장에, 또한 우리의 안보환경에도 영향을 미치는 사건이라는 점에서 비슷하다.

다시 말하면 이데올로기 측면에서 맥이 이어질 수 있는 사건이라 할 수 있다. 과거 같으면 감히 입에 올리기 어려운 하나의 금기(禁忌)적인 사항들이 이제는 자유롭게 제기돼 사회의 이슈로 부각되고 있는 것이다.

노근리 사건은 억울하고 원통한 사건이다. 더구나 냉전상황이라는 빌미로 한.미 당국자들에 의해 가족들의 호소가 계속 묵살되었다니 분노가 치민다.

고엽제를 맨손으로 철모에 담아 뿌렸다는 증언들이 나오고 피해자들이 이름 모를 후유증에 시달린다는 보도도 있다. 지금 와서야 병인(病因)을 알게 됐을 때 정부를 보는 피해자들의 심정이 어떠하겠는가.

과거 같으면 눈을 부릅뜨고 북한을 이롭게 한다는 등의 협박으로 숨겨질 일들이 이제는 드러나 치유과정을 거치게 됐으니 우리 체제가 그만큼 튼튼해져 가고 있다는 증거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밖에서 볼 때 아쉬운 점은 두 사건에 대한 접근에서 우리는 너무 한쪽으로만 치우쳐 가고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노근리 사건은 무슨 이유를 대도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보면 전쟁으로 빚어진 재앙이었다는 측면 또한 부인할 수 없다. 한국전쟁 와중에 2백만명의 무고한 민간인이 희생됐다.

문제의 핵심은 북한의 침략을 저지하기 위한 전쟁의 와중에서 이런 일이 빚어진 것이다. 이번 사건을 보는 미국 시각은 우선 부끄러운 일이라는 반성과 함께 진상조사를 촉구하는 분위기가 있는 반면 이런 일들이 전쟁이라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 빚어졌다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우리의 경우는 왠지 미군이 양민을 학살했다는 점만 부각될 뿐 북한의 전쟁도발과 전쟁상황의 이해라는 점은 아예 거론이 안되고 있다.

고엽제 문제 역시 마찬가지다. 그런 위험물질을 뿌렸다는 것만 부각될 뿐 왜 그것을 뿌릴 수밖에 없었는가 하는 문제는 다뤄지지 않고 있다.

60년대 말 김신조의 청와대 기습사건 등 북한의 비정규군의 침투가 고조된 상황에서 작전 편의상 고엽제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던 측면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와서는 당시 위험했던 안보상황에 대한 이해는 무시된 채 왜 그런 것을 뿌렸느냐, 누가 뿌리라고 시켰느냐는 질책과 원망만 무성할 뿐이다.

과거에는 그 원인과 배경의 무게에 짓눌려 문제점과 부작용은 아예 거론도 안되더니 이제 와서는 문제점과 부작용만 부각되고 그 원인.배경은 무시되고 있다.

특히 당시 책임있던 사람 중에 살포의 불가피성이나 후유증의 무지(無知)에 대한 설명이 있을 법한데 모두 침묵하고 있다.

서경원 간첩사건은 노근리 사건이나 고엽제 후유증 문제와는 성격상 전혀 다른 사건이다. 그러나 지금 논의되는 과정을 보면 서경원 발언 파문도 위 두 사건과 유사한 전개 과정을 밟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북한에 들어가 공작금을 받고 나온 간첩이라는 원인과 배경은 사라지고 논의의 초점이 고문을 했느니 안했느니로 넘어가고 있다. 고문을 해도 괜찮다는 얘기가 아니다.

이 사건의 본질은 고문사건이 아니라 간첩사건이라는 점이다. 그런데 간첩사건이 인권사건으로, 북한 공작금이 통일 지원금으로 둔갑되는 혼돈이 왜 발생하는가.

왜 사건이 있게 된 근본 배경은 도외시되고 그로부터 파생된 문제점만 부각되고 있는가. 문제가 감춰져 있었다면 이를 꺼내 해결해야 한다. 그러나 갑자기 한쪽의 목소리만 커지고 다른 쪽은 자취를 감추는 비정상적인 상황이 돼서는 안된다. 근본 배경과 그로부터 파생된 문제점을 균형있게 바라보는 시각이 필요한 때다.

문창극 미주총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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