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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언대] '영어 공용화' 아닌 교육이 문제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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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영어를 한국어와 함께 쓰자는 소위 영어공용어론 자들이 적잖은 것 같다. 주로 산업계, 특히 정보통신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그런 주장을 펴고 있다. 최근 자유기업센터의 고위직 인사가 2000년대부터는 영어공용어 채택운동을 본격적으로 벌이겠다는 뜻을 천명하고 나섰다.

그래서인지 방송매체들이 시청률이 가장 높은 저녁시간대에 이 문제를 공개적으로 논의에 부친 적이 있다. 특히 EBS에서는 1백분 가까이 생방송을 했고, 방송 후 시청자들의 의견을 물은 결과 62%가 영어공용어 채택을 찬성하는 것으로 나와 문제의 심각성을 보여주고 있다.

무역업이나 정보통신업.관광업 등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보통의 시민보다 영어에 접할 기회가 많다. 또 국내에서 열리는 거의 대부분의 학회도 영어로 통역 없이 진행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영어가 짧으니 당사자들은 고통을 겪는 것이다. 아니 고통 정도가 아니라 아예 질려버리는 것이다. 이런 개인적 차원 이외에도 영어를 못하면 결국 국제화에 뒤지게되는 세계의 추세를 무시할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영어를 좀더 효율적으로 배워 더 숙달하자는 것과 그것을 공용어로 쓰자는 것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첫째, 우리가 영어를 공용어로 쓰면 필리핀의 경우와 같이 국민의 약 20%가 영어 상용자가 될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국토 분단에 이어 '언어에 의한 국민의 재분단' 을 초래할 수 있다.

둘째, 우리 국민이 말에 의한 한국적인 문화창달에 어려움을 겪게 된다는 점이다. 인간의 감정은 상상력에 따른 말의 선택에 의해 예술화된다. 그런데 영어를 상용하게 되면 우리는 인디언처럼 겉으로만 한국인이고 사실은 미국인이 돼버리는 결과를 빚게 될 것이다. 영어로 시와 소설을 쓰지 않아 노벨상을 못탄다는 소리는 잠꼬대 같은 소리다. 한국적인 것만이 세계적인 문학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셋째, 공용어란 원래 정복국가가 피정복국가의 존재를 말살하기 위해 사용하는 민족 말살정책이다. 말은 민족의 생명이다. 말을 빼앗겨 버리면 그 민족의 실체는 자취를 감춰버린다. 민족 나름의 문화를 창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만주족이 단적인 예다. 만주족은 그들의 말을 중국의 한족에 빼앗겨 버려 오늘날 존재가 희미한 실정이다. 그러나 같은 자치족이지만 티베트족은 티베트어를 잘 간직해 지금까지 중국 한족에 동화되지 않았다. 캐나다의 퀘벡주가 영어의 바닷속에서도 프랑스어를 고수하고 있는 것은 같은 맥락이다.

넷째, 영어가 영원히 세계어가 되라는 법은 없다는 점이다. 중국.아랍.독일.프랑스.러시아.스페인 등 미국에 못지 않은 문화국가들이 영어를 공용어로 채택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미국의 경제력이 대단하나 세계는 경제만으로 움직여지지 않는다. 영원한 세계어란 역사적으로도 존재하지 않았다. 세계사에서 가장 강대한 국가였던 로마나 몽고제국의 언어도 사라지지 않았는가.

다섯째, 영어를 공영어로 한다 해도 반드시 잘산다는 보장이 없다는 점이다. 이는 영어 공용국인 필리핀이나 인도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영어는 현재 중요한 외국어일 뿐이다. 그러나 모국어는 우리 한민족의 동질성을 보장하는 유일하고 영원한 매체다. 피만 같다고 하나의 민족이 아니다. 언어가 같아야 같은 민족이다. 동족이라도 언어가 달라지면 민족의 분열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정소성(鄭昭盛)단국대교수.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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