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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급진단 위기관리 시스템이 없다] 2. 과거정권의 교훈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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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96년 12월 26일 오전 6시 국회 본회의장. 신한국당 의원 1백55명은 복수노조 3년 유예가 담긴 노동관계법안 등을 6분40초 만에 날치기 처리했다.

국민회의.자민련은 길거리 투쟁에 나섰고, 한국노총.민주노총은 파업에 돌입했다. 새해 들어서도 정국은 막혀 있었다.

김영삼(金泳三.YS)대통령은 "복수노조 유예는 잘못" 이라며 노동관계법 재개정을 약속, 후퇴했다.

YS정권으로선 도덕성에 상처만 입은 셈이 됐다. 당초 신한국당은 야당과 노동법안 합의처리를 약속했다. 하지만 "청와대 일부 강경파들 때문에 사고가 터졌다" 고 당시 신한국당 총무였던 한나라당 서청원(徐淸源)의원은 회고했다.

정상적인 국정의 협의 시스템을 외면한 일부 인사들에 의해 시도된 밀어붙이기가 국정에 치명상을 안겨준 것이다. 국정운영의 소수 독점 때문이었다. YS는 곧이어 터진 차남 현철(賢哲)씨 문제로 집권 마지막해를 무기력하게 보내야 했다. 현철씨가 공직자 인사와 여당후보 공천에 관여하면서 국정운영은 이미 헝클어진 상태였다.

비선(秘線)조직의 국정영향력에다 국정관리 시스템을 개발하지 않은 YS의 실책은 집권의 공백상태로 이어졌다.

문민정권의 강력한 리더십을 외쳐온 YS가 위기관리수단으로 사용한 것은 인사였다. 그는 연말이 되면 집단적인 내각개편을 통해 국정분위기를 쇄신하려 했지만 잦은 인사는 부담으로 작용했다.

정책의 혼선과 정부의 권위만 떨어뜨리는 실책으로 대부분 나타났다. 대통령의 고유권한인 인사권을 위기관리수단으로 사용하는 문제점이 실감나게 드러났을 뿐이었다.

도덕성을 내세운 YS는 집권후반기에 여러 차례 '대국민 사과' 를 했지만 국면전환을 하기보다 청와대의 위신을 떨어뜨리는 부정적인 상황을 감수해야 했다.

YS는 집권후반기에 청와대와 당.정부.안기부 등 관계기관 협의의 효율성을 인정했지만 그 효과는 별로 나타나지 않은 채 임기를 마감했다.

6공시절 초기 노태우(盧泰愚)대통령은 위기관리의 역할을 박철언 정책보좌관에게 맡겼다. 그러나 특정인에 대한 의존은 집권세력의 갈등을 초래해 권력기반의 약화라는 문제점을 낳았다.

6공시절 위기관리 능력의 부족은 상당부분 盧대통령의 소극적인 리더십 때문이기도 하다. 그는 각 부 장관이나 청와대 참모진을 적극 독려하며 끌고가지도 않았다.

5공시절엔 대통령주재로 국정현안을 놓고 장관회의도 자주 있었고 수석비서관들과 대통령의 접촉이 빈번했다. 盧대통령은 관계장관회의의 결과를 별로 활용하지 않았다.

당연히 국정표류 상황에 신속히 대처하지 못했다. YS나 盧대통령이 국정혼선을 적기(適期)에 극복한 경우도 있다.

95년 6.27 지방선거를 앞두고 선거연기를 강조한 안기부 문건이 국민회의 권노갑(權魯甲)고문에 의해 폭로됐다.

그러자 YS는 즉각 관계자들을 문책했다. 문건 작성 당시 안기부장이었던 김덕(金悳)통일부총리와 정형근(鄭亨根.현 한나라당 의원)안기부1차장이 경질됐다.

이 사건 발생 전 청와대 비서실장을 역임한 한나라당 박관용(朴寬用)부총재는 "YS가 정공법으로 나가니까 문제가 수일내로 해결됐다" 며 "언론장악 문건, 국가정보원의 6.3재선거 내부문건 사건을 처리하는 현 정권의 태도와 대조적" 이라고 주장했다.

盧대통령의 경우 여소야대 상황에서 5공청산 문제에 부닥치자 야권의 3金씨와 수시로 영수회담을 갖는 방식으로 문제를 풀어나갔으며, 중요 사안은 반드시 유관기관 대책회의를 통해 처리해 나갔다고 당시 정무수석을 지낸 한나라당 최병렬(崔秉烈)부총재는 기억했다.

崔부총재는 "5공때 안기부가 중심이던 유관기관 대책회의가 6공때는 청와대 비서실 중심으로 바뀐 것이 특징" 이라며 "盧대통령은 '물태우' 소리를 들었지만 밑에서의 현안 조정기능은 살아 있었다" 고 주장했다. 여권 관계자는 "현 정권의 경우 DJ측근들과 장관들의 정국인식이 달라 조율이 잘 안되는 게 가장 큰 문제" 라고 지적했다.

이상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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