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쇼’를 하라, 권력을 얻으리라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137호 09면

MBC 드라마 ‘선덕여왕’에 등장하는 김유신 (사진 위ㆍ엄태웅)과 김춘추(사진 아래ㆍ유승호)

삶은 만남이다. 태어날 때 부모를 만나고 친구를, 스승을, 연인을, 동료를, 고객을, 은인이나 라이벌을, 후계자를 만나고 죽는다. 언제 어떻게 누구를 만났느냐에 따라 삶의 물줄기가 바뀌고, 삶의 값어치가 달라진다.

함규진의 한국사를 움직인 만남 <1>김춘추와 김유신

우리가 한 부분이 되어 있는 역사도 마찬가지다. 적대자들의 만남, 조력자들의 만남, 새로운 시대를 열어갈 사람들의 만남이 씨줄과 날줄처럼 엮여 역사라는 큰 틀을 짜낸다. 가슴 벅찬 만남도 있겠고, 가슴 저린 만남도 있겠다. 불가능해 보였던 꿈을 이루는 만남이 있고, 두고두고 아쉬움을 남기는 만남이 있어, 개인의 운명을 바꾸고, 역사의 고비를 새긴다. 서기 630년 전후에 이루어진 김유신과 김춘추의 만남은 서로 밀어주고 끌어주는, ‘물과 고기의 만남’이다.

“여봐라, 저기, 저게 무엇이냐?”
“네? 무엇 말씀이십니까?”
“저기 아래쪽에서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오르지 않느냐? 가만있자. 저쪽은 김유신 공의 저택이 있는 쪽인데···. 불이라도 났단 말이냐?”

햇빛 화창한 금성의 남산. 한참 꽃놀이를 즐기던 여왕은 측근들에게 다급히 물었다. 얼마 후 상황을 살피러 갔던 호위병이 다급히 말에서 내려, 여왕 앞에 엎드렸다.

“···보고 드립니다. 김유신 공이 누이를 불태워 죽인다며 나무를 쌓아놓고 불을 질렀습니다.”
“뭐라고? 대체 그 무슨 해괴한 소리더냐? 이유는 무엇인지 알아보았느냐?”

김유신의 누이동생 문희가 처녀의 몸으로 아이를 가졌기 때문이라는 말에, 여왕은 이맛살을 찌푸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때 얼굴을 붉힌 채 고개를 숙인 김춘추가 눈에 들어왔다.

“알 만하다. 김유신 공 댁의 불장난, 바로 네가 범인이지, 그렇지?”
“·····.”
“자신이 지른 불은 자신이 꺼야 하는 법! 빨리 가서 그녀를 구하거라!”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꿈을 사서 왕비가 되다’의 이야기다. 이는 『삼국유사』를 비롯한 세 가지 기록에 전해지는데, 내용은 조금씩 달라서 『삼국사기』에는 ‘불장난’ 이야기가 나오지 않으며, 『화랑세기』에는 김춘추에게 김문희와의 결혼을 명령했던 당시 덕만은 아직 왕이 되기 전인 공주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 장면의 이면을 하나씩 짚어보면, 그렇게 단순하지는 않음이 드러난다. 우선 조금만 생각하면 김유신이 진심으로 누이를 죽이려 하지는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진심이었다면 백제의 계백이 처자를 죽일 때처럼 칼로 내리쳤거나, 자결하라며 비단 끈을 던져주거나 했을 것이다. 굳이 불태워 죽인다며 법석을 떨고, 장작더미에 사람은 넣지 않은 채 불부터 피워 연기가 멀리 남산에서 보일 정도로 솟아오르게 하지는 않았으리라. 집안 망신이라 누이를 죽인다는 것인데, 그런 망신을 그토록 동네방네 광고할 까닭은 없지 않은가?

그러면 왜 김유신은 굳이 그런 ‘쇼’를 해야 했을까? 누이와 김춘추를 우격다짐 식으로 결혼시키지 않으면 안 되었을까? 문희와 관계한 김춘추의 의사가 불투명했을 가능성이 떠오른다. 사실 김춘추는 이미 부인이 있었는데, 『화랑세기』에는 김춘추가 부인 보량 궁주를 사랑했고 그녀가 마침 임신 중이었기에 문희와의 결혼을 망설였다고 되어 있다.

하지만 단순한 남녀 간의 애정문제 이상의 정치적 이해관계도 있었을 법하다. 당시 신라 왕통은 성골로 전해지고 있었고, 김춘추와 김유신은 그보다 한 단계 아래인 진골이었다. 그러나 진골이 된 까닭은 전혀 달랐다. 김춘추는 그의 할아버지인 진지왕이 ‘황음무도’하여 폐위되었기에 성골에서 진골로 강등되었고, 김유신은 신라에 항복한 가야의 왕실 핏줄로서 진골에 편입된 상태였다. 말하자면 김춘추는 자신이 진골임이 불만스러웠고, 김유신은 신라 땅에서 살아남고 성공하려면 진골 명함에 매달려야 했다.

피의 순수성을 따지는 신라 사회에서, 이미 최초의 화랑이라 불리는 설원랑의 손녀인 보량 궁주와 혼인해 성골 아닌 성골을 지향하던 김춘추에게 ‘가짜 진골’과 사돈이 되는 일은 그리 탐탁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김유신 가문이 갖춘 군사적인 실력(김유신의 할아버지 김무력은 백제 성왕을 살해하여 진흥왕의 한강 유역 제패에 큰 공을 세웠다)이 탐이 나 친분을 맺었을 것이다. 김유신으로서는 자신과 가문의 입지를 튼튼히 하기 위해 김춘추와 단순한 친구 이상의 사이가 되어야 한다고 여겼으리라.

그런데 여기서 주의할 부분이 하나 더 있다. 이 결혼을 성사시키는 주역인 선덕여왕의 존재다. 남산에서 놀다가 우연히 멀리 떨어진 곳의 연기를 보고는, 그것을 지나치지 않고 끝까지 파헤쳐 진상을 드러낸다는 점은 어딘지 부자연스럽다. 김춘추는 나중에 고구려ㆍ일본ㆍ당나라를 두루 다니며 목숨을 내놓고 외교를 펼친 사람이다. 그런데 단숨에 알아볼 만큼 낯빛이 달라졌다는 것도 이상하다. 김유신과 선덕여왕 사이에 미리 이야기가 있었고, 각본에 따라 김춘추를 압박했다는 낌새가 짙다.

선덕여왕은 왜 그래야 했을까? 드라마를 보면 의식하기 어렵지만, 신라에서도 여성이 왕이 되기란 듣도 보도 못한 일이었다. 즉위 직전 칠숙과 석품의 난, 즉위 후 비담의 난은 모두 “어찌 여자가 우리를 다스릴 수 있는가”를 명분으로 했다. 진평왕에게 대를 이을 아들이 없어 덕만 공주가 왕이 되었으나, 그 입지는 매우 불안했던 것이다. 여왕은 보수적인 구 귀족보다는 야심과 재능이 넘치는 신진 귀족들과 손을 잡고 싶었다. 김춘추와 김유신은 최적의 파트너 감이었는데, 다만 김춘추는 경우에 따라서는 오히려 적이 될 수도 있었다. 진골로 강등되기는 했지만 왕위 계승 서열로는 오히려 자신보다도 앞섰기 때문이다.

따라서 두 사람이 손을 잡게 하고, 그 연대의 보증인이 자신임을 강조할 필요가 절실했다. 그것이 바로 김유신 집의 ‘불장난’의 원인이었다.

김춘추 입장에서는 다소 불만스러웠을 김유신과의 처남-매부로서의 만남. 그러나 그 만남은 더할 나위 없는 만남이었다. 이후 30여 년간 김춘추는 문(文)을, 김유신은 무(武)를 담당해 삼국통일의 주역이 되었다. 김춘추는 태종무열왕이 되고 김유신은 태대각간이 되어 최고의 부귀와 영화를 누렸다. ‘불태워질 뻔했던’ 문희의 아기, 김법민은 문무왕이 되어 통일을 완성했다. 개인이나 국가나, 당장의 입장이나 이해관계 때문에 보지 못하던 엄청난 만남의 가능성이 ‘장난’으로 비로소 현실화되기도 한다.



성균관대 정치학 박사로 현재 성균관대 부설 국가경영전략연구소 연구원으로 있다. 『정약용 정치사상의 재조명』『왕의 투쟁』등의 책을 썼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