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속의 '노근리'… 소설같은 만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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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소설같은 50년만의 만남이 이뤄졌다.

충북 영동 노근리사건의 실화소설인 '그대, 우리의 아픔을 아는가' 에 나오는 '홍기' 라는 소년과 주인댁 마님이 사건 발생후 50년만에 극적으로 해후했다.

사건 당시 15세이던 金모(64.대구시 북구)씨가 2일 노근리사건 대책위원장 정은용(鄭殷溶.76.실화소설 저자.대전시 서구 가수원동)씨 집을 찾아 鄭씨의 부인 박선용(朴善用.74)씨를 만난 것. 金씨는 당시 鄭씨 집에서 일을 하던 이른바 '꼬마 머슴' . 반세기의 세월이 흘러 서로를 바로 알아보지 못했지만 사지(死地)에서 함께 있었던 기억은 곧 두사람의 손을 맞잡게 만들었다.

"아주머님 죄송합니다. "

金씨는 먼저 朴씨에게 용서를 구했다.

양민들에 대한 미군의 무차별적인 총격이 한창이던 50년 7월 28일 밤. 야음을 틈타 朴씨와 아들, 金소년은 쌍굴다리를 탈출했다. 朴씨가 오른팔을 다쳐, 金씨가 주인집 아들을 업고 마을을 탈출한 것이다.

얼마를 갔을까 주인집 아들(정구필)이 자지러지게 울어대는 것과 거의 동시에 미군들의 총알이 머리위에 쏟아졌다.

金씨는 업고 있던 주인집 아들을 땅에 내려놓고 혼자서 현장을 벗어났다.

"업었던 아이는 숨진 것으로 생각했었습니다. " (실제로 사망함)

쏟아지는 총알 속에서 '살아야겠다' 는 생각밖에 없었던 것. 朴씨는 "하루 사이로 딸과 아들을 잃고 제정신이 아니어서 당시 金씨 원망도 많이 했다" 며 "난리 속에서 자기 목숨을 우선 챙기는 게 인지상정이 아니겠느냐" 고 말했다.

이날 만남은 최근 노근리 학살사건이 부각되면서 鄭씨의 이름과 얼굴이 언론에 자주 보도되자 金씨가 이들에게 만나자고 연락해 이뤄졌다.

金씨는 朴씨 모자와 헤어지면서 머리에 파편을 맞아 지금도 고생하고 있고, 막일 등으로 고단한 삶을 살아왔다고 전했다.

50년의 세월은 두꺼운 더께로 덮여있던 두사람 사이의 원(怨)도, 한(恨)도 다 씻어버렸다.

대전〓이석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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