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대우서 손뗀 김우중회장…한국 경제성장 신화 '압축판'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5면

"세계는 지구촌이라 불릴 정도로 좁아졌지만 아직 가보지 않은 길이 있고, 아무도 해내지 못한 일도 많다. 실패를 두려워 하지 말라. 미래는 스스로 개척해가야 한다. 그것이 인생이다" .

대우 김우중(金宇中.63)회장이 자서전격인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 에서 강조한 말이다.

무(無)에서 시작해 국내 최고 재벌의 자리에까지 올랐다가 다시 야인으로 돌아가게 된 金회장.

그의 '세계경영' 스토리는 그가 표현했듯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모험과 도전' 으로 점철돼 왔다.

학창시절 신문팔이까지 했던 김회장은 67년 단돈 5백만원으로 섬유회사인 대우실업을 세운뒤 32년만에 재계 순위 2위(자산 기준)의 대기업으로 발돋움시켰다.

창업 첫해 섬유원단으로만 동남아에 58만달러 어치를 수출, 현지 바이어들로부터 수출 원단 이름을 딴 '트리코트 김' 이란 별명까지 얻었던 그의 일관된 철학은 '해외' 였다.

자본도, 자원도 없는 한국경제 살길은 오로지 수출이라는 것이 그의 지론.

그후 정부의 중화학 육성시책에 힘입어 새한자동차.한국기계 등을 잇따라 인수하며 그룹의 면모를 갖췄다.

이 때 창업보다는 주로 부실기업을 인수하는 방식으로 사업을 키워 '부실기업 전문가' 라는 닉네임도 얻었다.

93년 '세계 경영' 을 모토로 다시 해외 사업에 본격 눈을 돌린 김회장은 아프리카 오지에서 혹한의 시베리아까지 누비는 정열을 과시했다.

이같은 해외 사업을 위해 그는 1년의 3분의 2를 해외 출장으로 보냈다. 세계 1백여개국에 약 6백개에 달하는 해외 사업장은 모두 그의 손길을 거쳐 탄생한 것이다.

하지만 한편에서는 무모한 확장 정책에 대한 비판도 끊이질 않았다.

수출등 장사엔 귀재이나 제조업엔 약하다는 평과 함께 1인 지배체제의 불안정성에 대해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높았다.

그러나 80년대 말 그룹의 대표적 부실기업이었던 대우조선을 현지에서 숙식을 하면서 정상화시킨 것이나, 94년에는 미국 제휴선인 제너럴모터스(GM)의 철수로 위기를 맞은 대우자동차로 집무실을 옮겨 홀로서기를 완수시킨 사례 등에서 볼 수 있듯이 그의 열의와 경영 능력은 높이 살 만한 것이었다.

그는 국제통화기금(IMF)체제에서 집권한 새 정권 집권 초기에 정권과 재계의 가교역할을 수행하기도 했으나 구조조정을 실기(失機)하며 그룹 해체 위기 맞았다.

최종현(崔鍾賢.98년 작고) 전 SK회장을 이어 재계 수장인 전경련 회장을 맡았다가 지난달 이마저 내놓았다.

술을 전혀 안 마시고, 골프도 시간이 없어서 못배웠다는 그는 유명인사에게 곧잘 따라붙는 스캔들 한 번 없는 모범을 보이면서 오로지 기업 경영에만 전력을 기울여왔다.

'세계 경영의 전도사' '영원한 청년기업인' '금융의 달인' '세일즈의 귀재' '워크홀릭(일 중독자)' 이라는 다양한 수식어가 보여주듯 한국경제성장의 압축판이라 할수 있는 金회장의 대우 신화는 이제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됐다.

민병관.표재용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