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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껍데기 없는 날달걀’ 살균·세균검사 없이…연 5억 개, 빵·과자 원료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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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세균에 오염된 달걀이 빵이나 과자의 원료로 쓰인다 해도 국내 법 규정상으로는 문제되지 않는 것으로 드러났다. 현행 법에 살균하지 않은 ‘액란(液卵)’을 식품의 원료로 써도 된다고 해놓았고, 또 이런 비살균 액란에 대해서는 세균이 얼마 이상 나와서는 안 된다는 검사 기준조차 없기 때문이다. 액란이란 깬 달걀의 흰자와 노른자를 말한다. 본지가 축산물가공처리법과 그 시행령 및 시행규칙, 국립수의과학검역원장이 고시하는 ‘축산물 가공기준 및 성분규격’ 중 알 가공품에 대한 내용을 확인한 결과다.

이에 따르면 현행 규정은 비살균 액란을 쓸 수 있도록 했다. 허용 기준은 ‘고유의 색택(빛깔)과 향미(향기와 맛)를 가지고 이미(색다른 맛)·이취(색다른 냄새)가 없어야 한다’는 매우 약한 조건만 갖추면 된다. 세균 오염 여부를 따지는 규정이 아예 없는 것이다. 농림수산식품부와 산하 수의과학검역원도 본지의 질의에 “비살균 액란을 세균 검사 없이 빵이나 과자의 원료로 쓸 수 있다”고 확인했다. 농식품부 측은 “만일 세균에 오염된 비살균 액란이 발견된다 해도 현행 법으론 액란 생산·유통 업체를 제재·처벌할 수 없게 돼 있다”고 덧붙였다.

서울대 김재홍(수의학) 교수는 “달걀은 어미 닭을 통해 대표적 식중독 균인 살모넬라균 등에 오염될 가능성이 있다. 비살균 액란은 세균 검사를 한 뒤 식재료로 쓰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지적했다. 최근에는 비살균 액란에서 식중독을 일으키는 황색포도상구균이 검출됐다는 보도가 나오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내에서는 법의 허점 때문에 전국 체인을 가진 일부 유명 제빵 회사들조차 비살균 액란을 세균 검사 없이 쓰는 실정이다. 익명을 원한 한 대형 제빵회사 관계자는 “비살균 액란은 냄새를 맡고 눈으로 훑어보는 정도의 검사만 한 뒤 빵·푸딩 등의 재료로 쓰기도 한다”고 전했다.

#법적으로 문제없고 가격도 저렴

“살균 액란은 더 비싸요. 다들 아무 문제없다고 값싼 비살균 제품을 찾는데 뭐하러 살균한 걸 달라고 합니까.”

이달 중순 찾아간 경기도의 한 계란 가공업체. “빵 공장들이 살균 액란을 찾느냐”고 묻자 사장의 답변은 이랬다. 그는 “살균 시설 투자에 2억원 이상이 들어 살균 액란이 비살균 제품보다 10~15% 비싸다”고 덧붙였다. 값이 싼 데다 법적 문제까지 없으니 빵 회사들이 비살균 액란을 선호하게 마련이다. 업계에 따르면 국내에서 한 해 소비되는 계란 100억 개 가운데 10억 개가량이 빵 등 각종 식품의 원재료로 쓰인다. 그 절반인 5억 개 이상이 살균과 세균 검사를 하지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

오랜 기간 비살균 액란을 써온 식품회사들은 나름대로 할 말이 있다. “설혹 살모넬라균 등에 조금 오염됐다 해도 빵이나 과자를 고열에서 굽는 과정에서 세균이 죽고 독소가 파괴된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빵처럼 ‘굽는’ 식품 원료로는 비살균 액란을 쓰고, 마요네즈처럼 가열하지 않는 가공식품에는 살균 액란을 쓴다는 것이다. "비살균 액란 때문에 식중독 사고가 일어난 일도 없다”는 게 식품업체들의 주장이다, 이에 대해 김재홍 교수는 “섭씨 70도 이상이면 살모넬라균이 죽는 것은 맞지만, 빵을 굽기 전에 액란을 다루는 사람을 통해 세균을 옮길 수 있다”고 지적했다.

#깨지 않은 달걀은 기준 엄격

이런 ‘교차 오염’ 가능성 때문에 선진국에선 비살균 액란의 사용을 엄격히 제한한다. 미국은 아예 모든 액란을 살균하도록 강제한다. 일본의 경우 비살균 액란을 허용하지만 세균이 얼마 이상 나오지 않아야 한다는 기준을 두고 검사를 하게 한다.

국내에서도 가정에서 사먹는 깨지 않은 계란에 대해서는 ‘살모넬라균이 없어야 한다’는 등의 철저한 위생 기준을 적용한다. 또 다른 대표적인 축산 가공품인 우유·분유는 선진국보다 더 엄격히 관리한다는 평을 듣는다. 미국과 유럽연합(EU)에서는 대장균이 1g당 10마리 이하면 1등급 원유로 인정받지만, 한국에서는 한 마리가 나와서도 안 된다. ‘바실러스 세레우스’라는 세균은 식중독을 일으킬 수 있다는 이유로 분유에서 1g당 100마리 이상 검출돼선 안 된다. 식품에 대해 까다롭기로 소문난 스위스(1g당 1000 마리 이하)보다 10배 강한 기준이다. 미국은 바실러스 세레우스 관련 규정이 아예 없다. 이에 비해 빵·과자 등의 중간재료가 되는 액란에 대해서는 관련 규정이 허술하다.


농식품부와 수의과학검역원은 세균 검출 기준조차 없는 비살균 액란 관련 법·제도의 문제를 최근 인식하고 개선에 나설 움직임이다. 익명을 원한 정부 관계자는 “비살균 액란에 대한 세균 기준을 내년 중에 만들 계획”이라고 밝혔다.

권혁주·최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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