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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삶의 향기

전기수(傳奇叟)의 추억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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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5면

‘이야기 할아비’로 불리는 한 노인 전기수(傳奇<53DF>)가 동대문 밖에 살았는데 그는 『흥부전』『장화홍련』『심청전』 같은 이야기책을 읽어주며 다녔다. 매달 초하룻날은 오간수다리, 초이틀은 배오개, 초사흘은 수표교, 초나흘은 대사동 입구, 초닷새는 종각, 초엿새는 남대문…… 이레째는 다시 거슬러서 올라가 또 내려왔다. 판이 벌어지고 신나게 책을 읽어나가다가는, 절정에서 갑자기 입을 다문다. 조바심 난 청중이 다투어 동전을 던져주면 그제야 다시 읽기를 계속했다.

이 동전들을 자루에 가득 담아 돌아오면서 불쌍한 사람을 만나면 그 돈을 모두 풀어버린다. 추운 겨울날 물건 못 팔아 노숙하는 장사치를 주막에 재워주거나, 떡을 훔쳐 달아나다 잡힌 아비 없는 아이를 보면 떡값 치러주고, 서린동 포청(捕廳) 앞에서 속전(贖錢) 못 물고 태(笞) 맞기를 기다리는 늙은이에게 속전을 대주고, 가난해 여의지 못한 과년한 딸과 목매려는 과부에게 분(粉)값을 대준다. 그는 주막에 들어 얼근히 취할 돈 몇 푼만 남긴다. 은혜를 어찌 갚느냐 붙들고 고마워하면 “흥부에게 갚아라” “심청에게 갚아라” 하며 이야기 주인공들에게 그 공을 돌린다.

소파 방정환의 ‘책 암송 읽어주기’는 전설적이다. 그는 천도교 강당에서 가끔 책 읽어주기 대회를 열었다. 방정환이 우스운 이야기를 읽어나가면 청중은 배꼽 쥐고 웃고, 슬픈 이야기를 읽어주면 모두 눈물 글썽이며 흑흑 느껴 울음바다가 되고 만다. 그런데 방정환은 책 읽어주기뿐만 아니라 몸짓 흉내도 썩 잘 냈다. 방정환은 몸이 뚱뚱하였다. 그 몸으로 삼복더위에 뻘뻘 땀 흘리며 이야기하는데, 몸이 바짝 마른 거지가 추운 겨울 벌벌 떠는 시늉을 하면, 그 뚱뚱한 몸이 바짝 말라 보이고 정말 추워서 떠는 것 같아, 청중까지 몸이 오싹해질 지경이었다고 피천득·윤석중·조풍연은 회고했다.

내 어린 시절 1940년대 화성 망월리 외갓집에 가면, 저녁마다 사랑방 가물거리는 등잔을 빙글 둘러싸고 앉아 한 사람이 낭랑한 목소리로 『이수일과 심순애』를 읽어나가면 모두들 웃고 울며 열광하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즈음 시골마을 집집마다 흔한 풍경이었다. 이때는 80% 이상이 문맹이었는데, 글을 깨우치고 나서는 장날 집집마다 다투어 책을 사들이던 모습이 기억난다. 이를 보면 한국인은 독서에 저력을 가진 민족이 아닌가 자부심을 갖게 된다. 그러나 근래 TV와 인터넷이 만연하고 나서부터 그 폐해가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

대한출판문화협회가 발표한 2008년 통계에 따르면, 2007년에 비해 신간도서 발행 부수가 19.6% 급감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꼴찌의 독서력을 다시 보여준다. 21세기 지식전쟁시대에 국가위기가 아닐 수 없다. 경제를 살리자고 야단들이지만, 경제의 원천은 지식이고, 그 지식은 독서에서 비롯된다. 최근 위기에 처한 활자문화를 살리자며 사르코지와 오바마가 두 팔 걷어붙이고 나섰다. 오바마는 미 상·하의원합동회의에서 부모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 “어떤 교육 정책도 부모가 TV를 끄고 아이들에게 책 읽어주는 것을 대신할 수 없다.” 이 가을 독서캠페인에 우리 대통령도 앞장서주면 얼마나 좋을까.

고정일 소설가·동서문화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