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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사람들 삶의 생생한 얘기들-아시아영화의 새 흐름 '네오 리얼리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8면

한마디로 '기적적인 연기' 라는 평가를 이끌어낸 이 영화의 두 주연배우가 모두 직업배우가 아니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 아버지 역할을 맡은 이는 철공소에서 일하는 기계공이었고, 아들 역할을 한 소년은 로마의 신문배달 소년이었다.

영화 '자전거 도둑' 이 갖는 정서적인 풍부함은 바로 보통사람들에 대한 사실적인 묘사에서 솟아나왔다.

지금은 할리우드 영화를 비롯해 대부분의 한국영화에선 미모와 젊음을 내세운 스타 배우들이 화면을 차지하고 있지만 영화 '자전거 도둑' 이 준 감동과 충격의 흔적은 50년이 지난 지금에도 유효해 보인다.

특히 최근 들어 세계에서 주목받는 아시아 영화들 사이에선 비전문 배우를 기용하고 극영화의 '장식성' 을 거의 배제한 채 다큐멘터리 스타일로 만든 영화들이 적잖다.

30일 개봉되는 중국 장이모 감독의 영화 '책상서랍 속의 동화' 와 앞서 개봉된 지아 장커 감독의 '소무' 도 바로 그런 영화다.

'영화 '책상서랍 속의 동화' 를 연출한 장이모 감독은' "자연스러운 연기를 끌어내기 위해 원작과 같은 시골학교를 찾았다" 는 장이모 감독은 아이들과 마을 촌장, 선생님, 방송국 국장까지 현지 실제 인물들을 기용했다.

그러나 "비전문 배우들과 함께 작업하기 위해선 적잖은 인내심이 필요하다" 고 고충을 털어놓기도. 진짜 배우가 아닌 이들로부터 자연스러운 연기를 이끌어내기 위해 그는 몇 개월간 이들과 함께 숙식했는가 하면 이들이 카메라를 의식하지 않도록 카메라를 숨겨서 촬영했다.

덕분에 영화는 보는 이를 쑥스럽게 할 정도의 투박스럽고 자연스런 그들의 생생한 모습을 스크린 위로 건져올렸다.

이란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은 이 분야에 있어 선배격이다. 장감독은 키아로스타미 감독의 영화들이 자신의 이번 영화에 영향을 미쳤음을 부정하지 않았다.

키아로스타미 감독의 영화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에서 강한 인상을 남긴 것은 스크린을 압도한 천진한 아이의 눈망울이다.

이 영화의 주제나 형식은 바로 이 꾸밈없는 연기안에 열쇠가 다 담겨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밖에' 어린 아이의 천진한 눈망울이 돋보였던 영화 '내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를 비롯해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 '올리브 나무 사이로' '체리의 향기' 등 그의 영화들은 마을의 보통 사람들이 배역을 맡고 일부 배역만 전문배우가 맡는 것으로 유명하다.

키아로스타미 감독은 비전문배우에 대한 철학이 확고하다. 그는 "영화에 익숙하지 않은 비전문배우들은 내 선입견을 고쳐주는 선생님" 이라고 말한다.

그들이 대사를 제대로 말할 수 없다는 것은 그것이 잘 못 쓰여진 대사라는 것을, 그들이 연기할 수 없는 장면이라면 그 작업에 무언가 잘못이 있다는 알게 해준다는 것.

"전문배우가 아닌 그들은 반쯤은 감독이고 편집자이며 시나리오 작가 "라는 말에 그의 독특한 영화관이 담겨 있다.

그러나 아마추어 배우를 사랑하는 키아로스타미 감독에게도 그들과의 작업이 인내심을 요하기는 마찬가지. 오죽했으면 그것을 '머리 심는 일' 에 비유했을까. " '올리브 나무사이로' 에 캐스팅된 호세인이란 청년과 친해지기 위해 일주일에 한번씩 그의 집을 방문해 얘기를 나누어야 했다" 는 그는 "한 번에 한가닥씩 머리를 심는 일처럼 오랜 인내심이 필요한 일" 이라고 말했다.

이밖에도 역시 이란 마흐말바프 감독의 '순수의 순간' 을 비롯해 자파르 파나히 감독의 '하얀풍선' 과 '거울' , 인도네시아 가린 누그로호 감독의 '베개위의 잎새' 등도 다큐멘터리와 극영화의 경계를 넘나들며 비전문 배우들의 자연스러운 연기에 비중을 둔 영화들로 손꼽힌다.

한편, 비전문배우들의 활약이 돋보이는 또다른 경우는 큰 자본없이 찍은 독립영화에서다. 지아 장커 감독의 '소무' 는 스튜디오 영화라는 틀을 벗어나 저예산으로 찍은 영화로 평범한 주인공의 외모와 연기, 그것을 담담하게 카메라로 좇은 다큐멘터리적인 접근으로 사실감을 높였다.

"우리는 낡아빠진 줄거리는 던져버리고 카메라를 리얼한 생활 한복판에 들이대려는 충동에 사로잡혔다" 는 데 시카 감독의 정신이 중국 젊은 감독의 영화에서도 읽혀진다.

부산영화제 아시아영화 프로그래머인 김지석씨는 "최근 아시아 영화들에선 극영화와 다큐 형식을 넘나'들고 비전문배우로 사실감을 높이려'드는 네오 리얼리즘적 경향이 두드러지고 있다" 면서 "여기에 검열이나 제작비 등 각 국가의 제작 환경이 끼친 영향을 무시할 순 없지만 현실 그 자체만으로도 풍부한 영화를 만들 수 있다는 영화관이 눈에 띈다" 고 말했다.

김씨는 또 "최근 감독들은 '거리의 배우' 를 단지 기용하는데 머물지 않고 이들과 대화를 나누며 그들의 경험을 시나리오에 반영하는 것이 특징" 이라며 "보통 사람들의 생생한 이야기가 스크린 깊숙이 들어오는 경향이 새로운 변화로 보인다" 고 덧붙였다.

어차피 영화는 '꾸며진 영상' 으로 얘기한다는 점에선 '거짓말' 이다. 조명이나 분장, 편집 등 손질이 가해진 그림으로 현실을 얘기한다는 점에선 더욱 그렇다.

그러나 그 스크린을 통해 현실을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 즉 진실을 말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욕구는 예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다.

이은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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