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노트] 왜 몰랐을까, 25년 만에 울려퍼진 숨은 명곡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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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반 판매 사이트 ‘알라딘’에서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을 검색하면 111개의 상품이 나온다. 피아니스트의 기교와 내면, 힘과 서정성을 동시에 보여주려는 수많은 피아니스트가 녹음·실연하는 작품이다. ‘협주곡 3번’은 94개의 음반이 검색된다. 라흐마니노프가 1901년 2번을 작곡하고, 8년 후 내놓은 3번 또한 그의 ‘타이틀 곡’이 됐다.

하지만 협주곡 4번은 39개의 음반뿐이다. 그나마 2, 3번을 포함한 협주곡 전곡 녹음이 주를 이룬다. 음반뿐 아니라 공연장에서도 4번은 ‘찬밥’ 신세다. 1970년대의 팝송 ‘올 바이 마이셀프(All by myself)’가 차용할 만큼 서정적인 2번과 영화 ‘샤인’에 나와 ‘괴물 협주곡’으로 불린 거대한 작품 3번에 비해 인기를 얻을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6일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에서 인기곡의 독점에 지친 청중의 숨통이 트였다. 피아니스트 백건우(63·사진 왼쪽), 지휘자 김대진(47·오른쪽)씨와 수원시립교향악단은 협주곡 4번을 무대에 올렸다. 현재 기록으로는 백씨와 KBS 교향악단의 25년 전 공연이 이 작품의 마지막 한국 연주다. 작품은 오케스트라의 짧은 인트로에 피아노의 꽉찬 화음이 화답하며 시작됐다. 그 이후 음악은 다소 무질서하게 흘러간다. ‘대중이 좋아할 만큼의 안전하고 뻔한 멜로디를 쓴다’는 것이 라흐마니노프의 2·3번 협주곡을 비판하는 이들의 논리였다. 하지만 4번 협주곡은 정해진 틀 없이 음악적 아이디어가 배치됐다는 점에서 기존의 인기 작품보다 세련됐다.

오케스트라와 피아노가 서로 무심한 듯 각자 중얼거리는 2악장은 보다 현대적인 라벨(1875~1937)의 피아노 협주곡 2악장을 떠올리게 했다. 피아노를 타악기처럼 두드리게 한 3악장의 재치 넘치는 리듬은 프로코피예프(1873~1943)의 실험 정신만큼이나 신선했다.

작품의 먼지를 털어내고 청중의 귀를 씻어준 것은 무엇보다 좋은 연주였다. 백건우의 정확하고 명징한 타건은 청년 피아니스트의 것 같았다. 어려운 기교를 요구하는 협주곡 4번에서도 그는 놀라운 기량을 마음껏 펼쳐냈다. 분명하고 계획적인 음악을 하는 지휘자로서의 김대진씨 또한 수원시향의 능력을 충분히 끌어냈다. 현악기 음색이 탱탱하고 윤기가 흘렀다.

두 명의 스타 연주자가 만나 2, 3번 중 하나를 연주했다면 객석은 더 꽉 찼을 수 있다. 하지만 이들은 ‘눈 앞의 과실’을 따 먹는 것보다 레퍼토리를 늘려 파이를 키우는 쪽을 택했다. 그 결과 이날의 청중은 라흐마니노프의 협주곡 4번의 가치를 발견했다. 이들 중 대부분은 어딘가에 또 있을 ‘숨은 명곡’을 찾아 나설 용기 또한 얻었을 것이다.

김호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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