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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오르는 밀레니엄 작가] 18. 佛 안드레이 마킨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7면

과자 냄새를 촉매삼아 주인공 마르셀이 기억 속에 봉인해둔 어린시절을 회상하는 프루스트의 명작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에서 보듯, 어린시절에 대한 기억이야말로 인간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가장 내밀한 재료이자 인간의 본원적인 향수 대상.

국내에는 아직 소개돼 있지 않지만, 러시아 출신의 프랑스작가 안드레이 마킨(42)을 세계적인 작가로 만든 것 역시 바로 향수 어린 기억의 힘이다.

러시아에서 태어났지만 작가의 어린 시절을 지배한 것은 프랑스의 이미지. 러시아인 남편과 결혼하기 위해 고향을 떠나온 프랑스인 외할머니를 둔 덕분이다.

자전적 성격이 다분한 첫장편 '프랑스식 유언' 에서 여름이면 시베리아 초원지대의 외할머니댁을 찾는 주인공 소년 안드레이는 바로 작가의 분신.

세계대전.10월 혁명 등 격동의 역사를 살아온 외할머니가 전하는 슬프고도 아름다운 서정과 프랑스의 이미지는 어른이 된 후에도 안드레이의 내면을 강렬하게 지배한다.

프랑스인과 러시아인, 어느 쪽도 온전히 되지 못하는 외할머니의 운명을 물려받기라도 한듯 마킨 역시 서른살 무렵 여동생과 함께 파리로 이주, 프랑스어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하지만 프랑스 태생이 아닌 그의 프랑스어 문장은 까다로운 편집자들로부터 번번이 퇴짜를 맞았다.

다행히도 그의 섬세한 서정을 높이 산 한 편집자의 도움으로 문장을 다듬어 펴낸 것이 바로 95년작 '프랑스식 유언' .프랑스 문학계는 이 작품에 그 해 공쿠르상과 메디치상을 나란히 수여, 마킨을 당당한 프랑스 작가로 인정했다.

향수는 갑갑하고 움직일 수 없는 현실로부터 위안을 준다는 점에서 꿈이나 환상과 같은 기능.

러시아에서 보낸 어린 시절에 프랑스에 대한 향수를 결합시킨 점에서 전작의 분위기를 고스란히 잇는 두번째 장편 '옛날에 러브 강가에서' 의 주인공은 황량한 시베리아 벌판의 작은 마을에서 뭔가 다른 삶을 꿈꾸는 세 젊은이. 이들을 위로하는 것은 프랑스 배우 장 폴 벨몽도의 영화들이다.

그러나 회상이란 항상 아름답기만 한 것일까. 최신작인 '올가 아비엘리나의 범죄' 에서 작가는 제정러시아 출신의 망명자들이 모여 사는 파리 근교 마을에서 벌어진 전직 러시아 관리의 살인사건을 시작으로 전작에 없던 극단적이고 광기어린 분위기를 창조해 나간다. 살인범으로 의심받는 것은 사회주의혁명을 피해 탈출, 현재는 남편에게서 버림받고 혈우병자인 아들과 살고 있는 제정러시아의 공주 올가다.

작가는 시간을 훌쩍 거슬러 올라가 황실에서 보낸 올가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끄집어내고, 실제와 환상이 뒤섞여 있는 올가의 회상 속에서 심리적인 상처를 짚어내기도 한다.

이후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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