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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속 기막힌 사연들-고제희著 '누가…벙어리 기생이라 했는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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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문화재는 입을 꼭 다물고 있는 기생이다. 뭇 사람으로부터 사랑을 듬뿍 받긴 하지만 어떤 사연으로 이 자리에 와 있으며 몇 살인지, 그리고 본명은 뭔지 언제나 묵묵부답이다.

하지만 고미술품연구가 고제희(41.대동풍수지리연구원장)씨가 펴낸 '우리 문화재의 숨겨진 이야기' 란 부제의 신간을 집어 들고 나면 사정이 달라진다.

책 제목을 '누가 문화재를 벙어리 기생이라 했는가' (다른세상.9천원)로 한 것은 그런 연유에서다.

애정을 담아 다루면 문화재란 이름의 기생도 결국엔 수많은 비밀을 털어놓는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셈이다.

추사(秋史)김정희(1786~1856)가 제주도 유배 당시 그린 그림으로 현재 손창근씨가 소장 중인 '세한도(歲寒圖)' (국보 제180호). 우리에게서 잊혀졌던 이 그림이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은 해방 직전인 1944년이었다.

경성제국대학 사학과 교수를 지내면서 추사의 학문과 예술 연구에 몰두했던 일본인 후지즈카 지카시(藤塚隣.48년 작고)가 중국 베이징(北京)의 한 골동상으로부터 입수했다가 그림을 가슴에 품고서 일본으로 귀국했다는 사실이 알려진 것이다.

이에 전남 진도 출신의 갑부이면서 고미술품 소장가였던 소전(素筌)손재형(81년 작고)씨가 일본으로 후지즈카를 찾아가 그림을 넘겨달라고 간청했다.

"이 그림엔 조선 선비의 정신이 배어 있습니다. 그래서 일본에 있어야 할 물건이 아닌 거지요. " 수십 번을 거부하던 후지즈카는 손재형의 삼고초려(三顧草廬)에 끝내 굴복했다.

"당신의 열성에 내가 졌소. 가져가시오. " 손재형은 바람처럼 날아 고국에 돌아왔다. 얼마 후 후지즈카의 집이 폭격을 맞아 불탔다는 얘기를 전해들은 그는 다시금 가슴을 쓸어내렸다.

'세한도' 의 사연은 여기서 끝나는 게 아니다. 정치에 투신해 재산을 탕진했던 손재형은 결국 그림을 고리대금업자에게 넘겼다. 하지만 돈을 갚을 길이 막연해지자 소유권을 포기, 개성 갑부 손세기씨에게로 넘어갔고 지금은 그의 아들 창근씨가 소장 중이다.

세상 물건이 다 그렇듯 문화재도 때에 따라 주인이 달라지는 법인가. 저자가 전하는 사연은 무척 흥미진진하다.

1930년대초 한 골동거상에 의해 친일파 송병준의 집에서 불쏘시개로 태워지기 직전에 겸재(謙齋)정선(1676~1759)의 화첩을 건져내던 일화가 그렇고 96년 북한 출토 금동미륵보살반가상에 얽힌 모조품 시비, 또 지난해 본지가 단독보도했던 고조선 미송리 토기가 출처불분명 시비에 휘말려 국립중앙박물관으로부터 인수거부를 당한 뒤 결국 고려대박물관에 기증되는 안타까운 사연 역시 마찬가지다.

저자를 통해 자신의 숨겨진 과거사를 털어놓는 문화재는 서화.도자기.불상 등 30점에 달한다. 여기에는 도난.도굴사건은 물론 감정시비.테러까지 얼룩져 있을 정도다.

저자는 특히 이같은 문화재 확보.전수 과정에서 유난히도 문화재를 사랑했던 인물들을 주목하고 있는데 호암(湖巖)이병철(87년 작고).간송(澗松)전형필(62년 작고)등 거물급 말고도 이름 모를 골동상의 역할을 결코 가벼이 할 수 없다는 게 저자의 지론이다.

이같은 비화공개 말고도 고미술품 감정과 경매제도의 문제점과 개선방안을 함께 밝히고 있는 부분도 이 책에 빠뜨리기 어려운 대목이다.

허의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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