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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그룹 멤버가 48명?

중앙선데이

입력

"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가요를 담당하는 기자들의 고충 중 하나가 ‘아이돌 그룹 멤버 이름 외우기’다. 그런 면에서 올해는 참 고단하기 그지없었는데, 쉴 새 없이 새롭게 등장하는 걸그룹들 때문이었다. 남자 아이돌 멤버 외우기야 ‘상큼이’ 찾아내는 재미로 기꺼이 해낸다지만, 걸그룹 소녀들의 얼굴은 어쩜 그리도 비슷하게만 보이는지…. 얼마 전 한 일본 연예기자에게 이런 고민을 털어놓았다가 오히려 무안만 당하고 말았다. 그의 절절한 외침. “혹시 ‘AKB 48’이라는 일본 걸그룹을 알아? 멤버가 무려 48명이라규!!”

일본에서는 10년 전쯤 ‘걸그룹 전성시대’가 시작됐다. 1990년대 후반 ‘스피드’ ‘모닝구 무스메’라는 두 그룹이 폭발적인 인기를 얻기 시작하면서 걸그룹 전문 연예기획사 ‘하로 프로’를 중심으로 ‘베리즈 코보’ ‘큐트’ 등 다양한 걸그룹이 생겨났다. 우후죽순처럼 늘어나는 걸그룹 사이에서 팀의 개성을 각인시키기 위한 ‘컨셉트’도 중요해졌다. 일본 소녀그룹의 ‘원조’ 격인 1980년대 ‘오냥코 그룹’에서 ‘모닝구 무스메’로 이어진 ‘입학-졸업 컨셉트’는 어린 멤버들이 팀에 들어왔다가 일정 정도 인지도를 얻으면 솔로로 독립하는 시스템을 말한다.

멤버들의 취미를 컨셉트로 삼아 ‘데쓰돌(철도 아이돌)’ ‘애니돌(애니메이션 아이돌)’ 등의 별명을 붙이기도 하고, 목장에서 일하며 공연도 하는 걸그룹 ‘컨트리 무스메’도 등장했다. 요즘 일본에서 화제가 되고 있는 ‘AKB 48’은 ‘퍼포먼스돌’을 컨셉트로 내세운 그룹이다. 48명의 멤버들이 10~20명씩 조를 짜 도쿄 전자상가 아키하바라에 있는 전용공연장 ‘AKB 48 극장’에서 매일 공연을 한다.

‘AKB’라는 팀 이름은 아키하바라의 약칭 아키바(AKIBA)로부터 따온 것. TV 속의 ‘머나먼 아이돌’이 아니라 공연장에 가면 손에 잡힐 듯 가까이서 볼 수 있는 아이돌이라는 게 이들의 강점이다. 문제는 이들의 공연이 지나치게 섹시하다는 것인데, 중·고등학생도 포함된 멤버들이 무대에서 너무 짧은 교복치마를 입고 춤을 추거나, 속옷이 보이는 퍼포먼스를 해 논란이 됐다. 최근에는 멤버 한 명의 10대 시절 누드 사진이 인터넷에 공개됐는가 하면, 이 그룹 전 멤버가 자신이 고등학교 때 낙태를 했었다는 사실을 털어놔 연예계가 시끄러웠다. 인기를 유지하기 위해 일부러 각종 구설을 만들어 내는 것 아니냐는 의혹이 나올 정도다.

이제 막 ‘걸그룹 전성시대’가 시작된 한국의 경우도 상황은 비슷하다. 짧은 치마를 입고 ‘제기차기 춤’을 추던 ‘소녀시대’의 속옷이 보였나 아닌가가 화제가 되고, 한 걸그룹 멤버의 허벅지에는 ‘꿀벅지’라는 민망한 별명이 붙었다. 한 가수는 “걸그룹 ‘카라’의 엉덩이춤을 보면…, 미칠 것 같다”고 방송에서 당당히 말하기도 했다. 30~40대 남자들도 좋아하는 걸그룹 하나쯤은 다 있다는 요즘, 이들이 극장에서 정기공연을 연다면 당연히 남성들이 벌떼처럼 모여들 터.

걸그룹들의 점점 짧아지는 치마와 섹시코드 경쟁을 보며, 여성의 ‘성 상품화’를 경계하는 목소리가 높은 요즘이다. 그러나 ‘짐승 아이돌’의 ‘옷 찢기 퍼포먼스’에 누구보다 열광했고, ‘꽃남 48’ 같은 그룹이 등장한다면 서둘러 인터뷰를 요청할 것이 분명한 필자로서는, 그저 조용히 입을 닫을 밖에. 쩝.

이영희 기자 misquick@joongang.co.kr


중앙일보 문화부에서 가요·만화 등을 담당하고 있다. 아이돌 그룹 ‘스마프(SMAP)’를 향한 팬심으로 일본 문화를 탐구 중이다. J 팝을 비롯해 일본 만화·애니·드라마·영화 등에 폭넓게 촉수를 뻗치고 있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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