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TO-NGO '시애틀 대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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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미국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로 꼽히는 시애틀에 비상이 걸렸다. 다음달 30일로 예정된 세계무역기구(WTO) 3차 각료회의(뉴라운드)를 맞아 WTO와 비정부기구(NGO) 사이에 대규모 격돌이 예상되기 때문이다.

미국 최대의 전국노조조직인 AFL-CIO를 비롯한 노동단체와 미국.유럽의 환경단체, 소비자단체 등 3백여개 NGO 단체들은 회의기간에 맞춰 시애틀에서 대규모 시위를 벌일 계획이다. AFL-CIO가 약 1만5천명을 동원할 계획인 것을 비롯, 모두 5만여명이 크고 작은 집회와 시위에 참여할 것이라는 게 회의를 주최하는 시애틀 시당국의 추산이다.

각국 대표단과 취재기자단을 합친 회의 참석인원 5천명에 비해 10배가 넘는 규모다. 그러잖아도 교통난에 시달리는 시애틀에 최악의 교통 대란이 빚어질 우려도 낳고 있다.

시애틀 시당국은 지역경찰은 물론 연방수사국(FBI)의 도움을 받아 사상 최대의 경호 및 질서유지 대책마련에 들어갔다. 약6백만달러의 특별예산까지 확보해놓은 상태다.

NGO단체들이 이처럼 WTO 회의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이는 이유는 향후 세계무역질서를 규율할 WTO 뉴라운드에 자신들의 목소리가 거의 무시되고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우선 노동단체들은 WTO의 무역자유화 논리가 노동자들의 권익을 해칠 우려가 크다고 주장한다. 시장개방에 의한 직접적 피해는 주로 노동자들이 당하는데 이에 대한 고려가 거의 반영되지 않았다는 게 이들의 입장이다.

특히 제3세계의 저임금 노동을 통한 값싼 물품이 자유롭게 수입될 경우 최저임금 보호가 어려울 뿐 더러 심각한 노동환경 악화가 우려된다는 것이다. 게다가 이들 국가의 노예노동 및 아동 노동을 통한 임금착취에 면죄부를 주는 꼴이 된다는 주장이다.

환경단체들은 일방적인 무역자유화로 인해 각국의 환경기준이 악화되고, 환경오염이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비영리 환경단체인 '지구의 친구들' 은 "WTO가 생물과 무생물의 명확한 구분없이 수입.수출을 자유화함으로써 지구 생태계를 파괴시키고 휘발유를 비롯한 연료의 공해유발 방지 규정을 완화해 환경오염을 심화시킬 우려가 있다" 고 주장하고 있다.

소비자단체들 역시 자유무역이 소비자 권익을 향상시키는 측면이 있지만 WTO의 논의가 주로 기업의 이익을 대변하는 바람에 소비자들이 소외되고 있다는 입장이다. 특히 랠프 네이더가 설립한 소비자기구인 '공공 시민(Public Citizen)' 은 "WTO가 (자유무역의 명분 아래)회원국의 환경.건강.안전에 관한 기준을 약화시켰다" 고 지적했다.

한국의 수입고기 유통기간이 30일에서 90일로 연장된 것이 단적인 예라는 주장이다. 게다가 아직 유해 여부가 검증되지 않은 유전자 조작 식품의 수출입 자유화로 소비자들의 안전을 위협할 수도 있다고 지적한다.

이에 대해 WTO측은 '윈-윈(win-win)시나리오' 에 따른 새로운 보고서에서 "무역자유화가 되면 각국 근로자들의 생활수준이 향상되고 이는 궁극적으로 보다 나은 환경과 노동여건을 창출한다" 는 논리를 펴고 있다.

WTO의 마이크 무어 신임 사무총장은 "환경과 노동의 가장 큰 적은 무역이 아니라 바로 빈곤" 이라고 역설했다.

이같은 주장에도 불구하고 WTO의 역할에 대한 NGO단체들의 반발이 거세지자 WTO와 주최국인 미국 정부는 이들을 무마하기 위한 방안을 마련하느라 골머리를 앓고 있다.

미국정부는 자국 노동계와 환경단체들의 주장을 받아들여 이번 회의의 의제에 노동과 환경문제를 포함시켰다.

또 WTO는 공식일정에 앞서 하룻동안 NGO단체가 자신들의 주장을 평화적인 방법으로 개진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한편 WTO 관계자와의 대화시간을 마련키로 했다.

결국 앞으로는 정부간 무역협상도 NGO들의 목소리를 외면하고서는 원활하게 진행되기 어렵다는 게 다시 한번 판명된 셈이다.

워싱턴〓김종수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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