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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유고그룹 김종달 사장, 한·일 소싸움대회 성사시켜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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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부모 없는 자식은 자라날 수 있지만 나라 없는 백성은 살아갈 수가 없다. " 60여년 전 단신으로 일본에 건너가 오늘날 1천여명의 종업원을 둔 일본 구루매시 굴지의 유고그룹을 이끌고 있는 김종달(金鍾達.77)회장.

金회장의 성공은 그의 뚝심과 배짱, '나라 잃은 설움을 더 이상 겪지않도록 해야한다' 는 나라사랑에서 출발했다. 그가 단돈 5전만 들고 대한해협을 건너 간 것은 15세때인 1938년.

"당시 빵 한 개와 우표 한 장 값이 각각 3전 하던 시절이었다" 며 "경북 청도군 각북면 명대리 고향마을에 '잘 도착했다' 는 편지를 부치고 나니 빵 값이 모자라 굶을 수밖에 없었다" 고 金회장은 당시를 회상했다. 그 뒤 그는 오사카 근교에서 광원으로 6개월 남짓 지내다시피 오사카시 한 철공소에서 일하게 된다.

그 곳에서 金회장은 사지(死地)로 끌려갈 운명을 맡게된다. 징용에 끌려가지 않은 교포들을 대상으로 강제로 동남아 전선으로 내보내던 군속영장을 받게된 것. 하지만 당시 그를 아끼던 일본인 통장이 영장이 나오기전에 미리 알려줘 나고야로 도망, 화를 면했다.

金회장은 이후 엿.쌀장수 등을 하며 일본전역을 전전했다. 1940년 당시 금지됐던 소장수를 하다 경찰에 잡혀 징역20년을 선고받고 교도소에 수감됐다.

일본 패전으로 풀려난 그는 현재 유고그룹의 밑거름인 빠찡꼬 사업을 시작했다. 도쿄 아래의 시소오카시에서 32대의 빠찡꼬 기계로 현재의 유고그룹 핵심기업인 '럭키(Lucky)' 상호를 달고 장사를 했다.

하지만 일본 부랑자들의 강압에 시달리던 金회장은 그들 중 한명을 때린 것이 화근이 돼 야다마하시로 탈출했다.

그 곳에서 빠찡꼬 사업을 5년 정도 하던 그는 지금의 유고그룹 본사가 있는 구루매시로 옮겼고 기계가 3백80여대로 늘 정도로 사업도 확장됐다.

지금 유고그룹은 빠찡꼬 사업장 20개의 럭키상사와 로얄호텔, 나고야시의 근간온천 등을 두고 있다. 연간 매출은 2천억엔대. 金회장은 "자산으로만 보면 한국에서 두번째는 갈 것" 이라며 웃었다.

그의 고향과 조국에 대한 사랑은 남다르다. 자주 고향을 찾기 위해 20여년 전부터 이미 각북면 명대리 고향에 집을 두어 왔다.

마을 진입로를 확.포장하고 마을회관과 각북면 노인회관 건립 등에도 거금을 쾌척했다. 87년 마무리를 못하던 청도군민회관 건립에 자신의 기부금 5천만원을 포함, 일본에서 마련한 1억2천여만원을 내놓았다.

특히 서울올림픽 공원조성 사업에 1억엔을 기부했다. 지난 3월 청도 소싸움 축제때는 일본소 3마리를 실어나르는 비용 6백50만엔을 책임지면서까지 성의를 다해 한.일 소싸움 대회를 성사시키기도 했다.

김상순(金相淳)청도군수는 "그의 도움으로 올해 청도 소싸움대회는 한.일간 국제행사로 발돋움할 수 있었다" 고 말했다. 그의 조국사랑은 구루매시 그의 자택에서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일본식이 아닌 한국전통의 기와집 대문에는 '金鍾達' 이라고 한자로 씌여진 문패가 걸려 있다.

金회장은 지금 다리관절과 허리가 조금 불편해 지팡이를 짚지만 아직 정정하다. "뿌리 없는 나무는 죽을 수 밖에 없다" 는 생각으로 金회장은 어떤일이 있어도 1년에 10번 이상 한국을 방문한다. 지난달 28일에도 고향을 방문, 성묘한 뒤 일본으로 돌아갔다.

金회장은 "한국이 21세기를 이끄는 선진국가로 발돋움 하기 위해서는 중소기업을 키워야한다" 는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김종달사장 약력

▶23년 경북 청도 출생

▶38년 단신으로 도일(渡日)

▶48년 시소오카시에서 빠찡꼬 사업체 '럭키' 설립

▶53년 '럭키' 본사 구루매시로 이전

▶79년 로얄호텔 건립

▶80년 근간온천 설립

▶85년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자문위원

▶현재 청도군 재일군민회회장

조문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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