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림픽 태권도]번개 같은 한방…종주국 자존심 지켰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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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일 새벽(한국시간) 문대성과 알렉산드로스 니콜라이디스(그리스)의 남자 태권도 80㎏ 이상급 결승전이 열린 팔리로 스포츠센터. 스탠드를 가득 메운 그리스 관중은 니콜라이디스의 응원에 열을 올렸다. "헬라스! 헬라스! (그리스 사람들이 자기 나라를 부르는 명칭)"라는 외침과 함께 관중석 발판을 구르는 소음은 문대성을 압박하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이들의 함성은 경기 시작 2분10초 만에 물을 끼얹은 듯 사라졌다. 이른바 '회축'이라고 불리는 문대성의 왼발 뒤후리기 한방에 2m 거구인 니콜라이디스가 무너져 내렸다. 쓰러진 니콜라이디스는 한동안 쓰러져 정신을 차리지도 못했다. KO승. 한국 선수들의 경기 때마다 판정과 관련해 나오던 다른 나라들의 볼멘소리를 한방에 잠재운 멋진 승리였다. 처음엔 야유를 퍼붓던 그리스 관중도 문대성이 태극기를 들고 장내를 돌자 기립해 큰 박수를 보냈다.

한국인 오영주 사범의 지도를 받은 니콜라이디스는 지난 7월 한국을 찾아 친선경기를 갖기도 했던 '한국통'. 문대성에 대한 정보를 많이 갖고 있는 데다 체격조건까지 앞서 있던 만큼 처음부터 거칠게 문대성을 몰아붙였다. 그러나 문대성은 전혀 당황하지 않고 경기 10초 만에 먼저 1점을 따냈다. 그리고 실점을 만회하기 위해 달려들던 니콜라이디스의 턱에 뒤후리기를 작렬시켜 승부를 결정지었다.

문대성은 "니콜라이디스와 국내에서 두 차례 맞붙어봤는데 그때는 전력을 숨기기 위해 천천히 뛰었다"고 말했다.

니콜라이디스가 정신을 차리자 포옹한 뒤 함께 손을 잡고 장내를 돌며 챔피언의 아량까지 보여준 문대성은 "훈련 파트너였던 팀 동료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고 말했다.

아테네=특별취재팀

*** 아테네 올림픽 특별취재팀
◆스포츠부=허진석 차장, 성백유.정영재.김종문 기자
◆사진부=최승식 기자

시드니 대표 탈락 후 아시안게임서 '우뚝'

◆ 문대성은=1m90㎝.92㎏의 체격에 시원시원한 이목구비. 두 개나 갖고 있는 인터넷 팬 카페의 500여 회원들은 그를 '태권브이'라고 부른다.

그에겐 힘든 시절이 있었다. 대선배 김제경의 그늘에 가려 오랫동안 '2인자' 자리에 만족해야 했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을 앞두고 열린 대표 선발전에서도 김제경에게 져 2위에 그쳤다. 후배를 배려한 김제경의 은퇴로 다시 금메달의 꿈에 부풀었지만 결국 김경훈 선수가 대신 나가면서 올림픽 출전 꿈을 접어야 했다. "한동안 술독에 빠져 살았다"고 회상할 만큼 상실감이 컸었다. 그러나 식힐 수 없는 태권도에 대한 열정이 다시 한번 도복 끈을 조이게 했다. 그리고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 우승으로 재기의 신호탄을 쏴올렸고, 지난해 세계선수권대회까지 제패하며 비로소 헤비급 최강자에 등극했다. 선수생활로 바쁜 시간을 쪼개가며 도장을 운영할 정도로 성실한 그의 좌우명은 '정직과 최선'이다.

남궁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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