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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를 넘어] 3. 제국주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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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중앙일보가 밀레니엄 기획의 일환으로 경남대(총장 박재규)와 공동기획한 '세기를 넘어' 연재의 세번째로는 '제국주의' 를 준비했다.

20세기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 중 하나가 19세기 후반부터 본격화됐고 20세기에 들어와 식민지 쟁탈을 위한 두번의 세계대전을 야기한 제국주의다.

제국주의는 그 억압적 성격 때문에 불가피하게 등장할 수밖에 없었던 민족해방운동과의 역동적 대결 속에서 20세기 전반의 사건을 엮어내 왔다.

그리고 '시장을 통한 독점' 을 추구하는 신자유주의를 통해 새로운 지배형식을 마련함으로써 아직도 제국주의는 여전히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는 견해도 적지 않다.

이번 회에서는 제국주의의 지배형식이 어떻게 변화해 현재화하고 있는지를 살펴본다.

유럽의 주요 도시들은 한마디로 제국주의를 상징하는 조형물의 전시장이다. 파리 에펠탑에서 멀지않은 앵발리드의 나폴레옹 유해가 안치돼 있는 돔교회 앞엔 식민지 개척에 공을 세운 갈리에니 장군의 위풍당당한 동상이 서있다.

의미심장한 것은 아시아.아프리카인을 비롯한 4개 인종의 부조상(浮彫像)이 동상을 받쳐주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 외에도 버킹엄궁 광장을 둘러치고 있는, 각 대륙을 표시한 돌기둥과 그곳에 새겨놓은 식민지 국가의 이름들, 자신의 언어를 사용하는 27개 국가를 상징하는 꽃잎으로 받치고 있는 마드리드의 스페인 공원 분수대 등 헤아릴 수 없었다.

오만한 제국주의의 산물인 이 조형물들이 놓여 있는 장소가 제3세계인들의 관광명소가 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더 큰 아이러니는 조형물로 회고되고 반추되는 데 그쳐야 할 제국주의가 오늘날에도 형태를 바꿔 지속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케임브리지대의 다소 좁고 어둠침침한 연구실에서 만난 고프리 하코트(정치경제학)명예교수는 "세계화라는 이름으로 19세기말의 제국주의가 되살아나고 있다" 며 세계화를 '제국주의적 이익을 관철하는 함정' 이라고 경고했다.

식민지 체제 속에서 관세장벽이 없던 19세기 말의 세계 총생산대비 무역량의 비율은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아 당시의 세계화수준이 지금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는 얘기다.

사실 일반인들에게 '제국주의' 라는 말이 주는 뉘앙스는 다소 감정적이다. 정치학에선 '어느 국가를 특정형태로 침략하거나, 정치.경제.사회적 통제나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 으로 간주된다.

이같은 제국주의 개념이 자리를 잡은 것은 19세기 말. 미국.독일 등 후발산업국들이 세계시장에서 영국의 몫을 잠식해 들어가면서 새로운 시장과 값싼 원료를 확보하기 위해 식민지를 놓고 경쟁을 벌이는 '제국의 시대' 가 열린 것이다.

그렇지만 제국주의자들에겐 식민지 쟁탈전은 단순한 착취 이상이었다. 제국의 시민들은 세계 구석구석을 파고들어 식민지 경영을 하면서 '미개인을 문명화시켜주는 도덕적 의무' 를 실천하려 했던 것이다.

그리고 한 세기. 고전적 식민지체제는 두번의 세계대전을 치르면서 단계적으로 와해됐다. 고전적 제국주의가 광범위한 지역의 주민과 소수 제국주의 국가 사이의 억압적.적대적 관계를 토대로 하고 있었던 만큼 그에 맞서는 민족해방운동은 세계사적 필연이었다.

2차세계대전 전후 제3세계가 민족주의에 눈떠 독립을 요구하면서 더 이상 종래의 강압적인 수탈체제를 유지할 수 없게 됐다. 대신 자본주의의 국제화에 따라 식민통치를 하지 않고도 자유시장과 자유무역이라는 이데올로기를 보급하는 것만으로 충분히 초과이윤을 확보할 수 있게 됐다.

자본가들이 궁극적으로 바라는 것, 그래서 늘 모색하는 것은 시장의 독점적 통제다. 이 논리에 의하면 이젠 물리적인 힘에 의한 제국주의적 영토확장과 시장확대는 불필요하며 비생산적이기까지 하다.

그 방법 말고도 시장에 대한 독점적 통제가 얼마든지 가능하기 때문이다. 달러화가 기축통화로 자리잡고나서부터는 미국의 우월적 지위가 확보됐고, 소련 및 동구 사회주의가 붕괴된 후 소위 '팍스 아메리카나' 가 더욱 확고해졌다.

미국은 한 세기 전 제국들을 모두 합친 것보다도 큰 힘을 갖게 됐다. 미국에 대한 제국주의 혐의가 본격 씌워지기 시작한 것은 아시아.아프리카의 국가들이 61년 4월 인도네시아의 반둥에 모여 비동맹회의를 결성하면서부터였다.

국제사회와 제3세계에 민족주의를 고양시키는 데 커다란 기여를 한 비동맹회의가 미국을 타깃으로 삼은 것은 '지배방식의 변화' 와 무관치 않다.

이같은 인식은 미국내 일부 학자들도 동의하고 있다. '한국전쟁의 기원' 저자 브루스 커밍스(시카고대)교수는 미국의 현재 대외노선을 '후기 제국주의' 또는 '초제국주의' '신제국주의' 로 규정한다.

과거 영국처럼 자본가적 제국주의로 대변되는 고전적 의미의 제국주의와는 다른 의미의 제국주의라는 것이다.

미국 컬럼비아대의 잭 스나이더(정치학)교수의 설명은 왜 미국의 패권적.제국주의적 이해가 관철될 수 있는지 그 구조를 명쾌하게 해준다.

"강대국들의 제국주의적 팽창 시도는 군부.재계.관료 등 파벌적 이익집단들을 위한 것이다.

이들은 자신의 이기적 정책을 정당화하고 일반대중을 기만하기 위해 국가안보는 팽창을 통해 확보된다는 '제국의 신화' 를 만들어낸다. "

미국의 패권적 이해를 보호해주는 것이 국제기구라는 인식도 널리 퍼져 있다. 국제통화기금(IMF)을 비롯해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기구들이 세계무역의 확대를 목표로 네트워크를 형성해 구 식민지세계에 대한 통제를 유지한다는 것이다.

나아가 이라크.리비아.코소보처럼 이 네트워크에 도전하는 국가에 대해서는 전쟁을 통해 제재를 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영국 케임브리지대 연구실에서 만난 장하준(정치경제학)교수는 "IMF는 선진국의 제국주의적 이해를 관철하는 기구일 뿐" 이라고 단언했다.

1944년 만든 IMF헌장에 따르면 이 기구가 간여할 수 있는 것은 국제수지뿐인데도 "아시아 국가의 기업.노동.재정에 개입하는 것은 국가주권을 침해하는 월권" 이라고 비난했다.

아직도 과거 제국주의의 상흔은 아물지 않았다. 제국주의자들이 제멋대로 그려놓은 국경선으로 '저주받은 대륙' 아프리카는 물론 세계 곳곳에서 분쟁이 계속되고 있다.

이같은 분쟁은 아닐지라도 식민통치가 이식한 기형적 정치.경제구조로 내적 식민지 상태가 지속되고 있기도 하다. 중국.한국을 포함한 아시아 국가들은 2차세계대전을 포함한 격동의 역사를 거쳐야 했으며, 라틴아메리카는 진정한 해방을 허용치 않는 역사 속에서 부침을 거듭해야 했다.

이제 조형물 속에 갇혀 있어야 할 제국주의는 '시장경쟁에 의한 독점' 을 추구하는 신자유주의에서 그 부활의 증거를 찾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선 중요한 것은 아마도 '탈식민지화' 를 지향하는 자세일 것이다. 서인도제도 출신의 혁명가 프란츠 파농이 '대지의 저주받은 자들' 에서 부르짖은 것처럼 제3세계인들의 마음 속에 자리잡은 '식민지성' 을 넘어서는 일이 필요하다.

아울러 공존과 화해에 바탕을 둔 새로운 연대를 형성하는 데서부터 제국주의를 극복하는 단초를 찾아야 한다는 게 세계각국 진보적 지식인들의 공통된 주장이다.

특별취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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