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543. 아라리난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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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7면

제12장 새로운 행상 (21)

"허튼수작 말아요. 마누라를 팔아먹어도 증서 한 장 없이 거래한다는 사람들이 내 말은 못 믿겠다는 것도 개수작 아니겠소. 게다가 나더러 계획적이라고 몰아붙이는 거요 지금□"

"변상만 하면 선생을 인차 놓아준단 말입니다. "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소리. 날 얼간이로 보지 마시오. 내게 권총 들이대고 협박한다 해서 수중에 없는 돈이 하늘에서 쏟아지겠소□ 차라리 날 쏴 죽이라 하시오. "

"그렇게 버티면 선생께 해롭단 말입니다. 이 사람들이 애, 장사 못하게 한단 말입니다. " "저들이 억울한 일을 당했다면 한국대사관을 통해서 해결할 방도를 찾아야지 나를 사기꾼으로 몰아 코를 꿰려 들면 해결은커녕 일만 꼬인다는 것을 깨달아야지요. "

태호는 힐끗 현관문을 일별했다. 지금까지 단 한번도 의자에 앉는 것을 보지 못했을 만치 긴장을 늦추지 않고 있는 사내들의 태도에 동요를 느꼈기 때문이었다.

숨겨 둔 돈을 꺼내 속시원하게 정산해준다면, 조선족 사내가 장담했던 대로 그를 놓아줄지 몰랐다.

억울하겠지만, 지금으로선 가장 현명한 방법이란 것에는 스스로 동의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협박의 빌미로 삼고 있는 차용증서의 진위 여부를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한글은 분명했지만, 손씨의 필적 따위를 유심히 관찰했던 기억도 없었고, 지문은 더욱 확인해 볼 기회가 없었다.

옌지에서의 손씨의 행적으로 보아 그런 일을 저지를 만한 심증은 있었지만, 심증만 가지고 사태를 단정지을 수도 없었다.

심증에만 의존한다면, 그 증서 자체가 얼토당토않은 가짜라는 결론도 가능했다.

게다가 앞으로 두 시간만 버티면 김승욱이 나타날 시각이었다.

옌지에서 두 사람의 행적을 거울 속 들여다보듯 환하게 꿰고 있었다는 것이 꺼림칙하였지만, 두 시간 후에 그녀가 나타난다는 약속만은 모르고 있을 게 분명했다.

숨겨둔 현금은 목숨이 위협을 당했을 때 마지막으로 쓸 카드로 남겨두자는 용기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녀와 있었던 약속 때문이었다.

사내들을 극도로 흥분시키지만 않는다면 큰 봉변을 당하지 않고 그녀가 나타날 때까지 시간을 끌어갈 수 있겠다는 막연한 자신감도 생겼다.

게다가 처음의 밀입국 때 노상강도를 만났을 때도 배포 좋게 대처해서 살아난 경험이 태호에겐 있었다.

결코 호락호락한 사내가 아니라는 것을, 평소에는 혐오스러웠던 애국심이란 것까지 터무니없이 뒤섞여 들면서 점점 그를 태연자약한 모습으로 가라앉히는 것이었다.

까짓거 한 번 죽지 두 번 죽임을 당할까. 단순하게 마음 먹었을 때, 이상하게 두려움 따위는 사라지고 느글거리던 위장도 가라앉았다.

그러나 그것은 태호 혼자만의 생각일 뿐이었다.

숙의를 거듭하고 있는 세 사내의 거동에 시선을 떼지 않으면서 조선족 사내가 다시 접근하기를 기다렸다.

우선은 고집을 꺾는 척하면서 두 시간을 무사히 버텨 볼 빌미부터 탐색해 보자는 속셈이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조선족 사내는 등을 돌린 채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어느 한 순간, 세 사람의 시선이 일제히 태호에게 꽂혔다.

암내하는 당나귀처럼 날뛰었던 다혈질의 사내의 입에서 태호가 알 수 없는 한 마디가 떨어졌다.

"랑타 상처. " (讓他 上車:저 놈을 차에 태워라. )

그들은 눈 깜짝할 사이에 아갈잡이하고 뒷결박한 태호를 문밖으로 끌어냈다. 밖은 아직도 어두웠다.

끌려나오기 전에 얼른 확인했었던 시각은 새벽 3시였었다.

한 시간만 지나면 동이 틀 시각이었다.

아래의 도로변에는 낡고 찌그러진 지프형 차량 한 대가 기다리고 있었다.

운전석에 오른 조선족 사내가 시동을 걸고 난 뒤, 난감하기 이를 데 없는 표정으로 두 사내의 겨드랑이 사이에 끼여 앉은 태호를 뒤돌아보면서 재빨리 말했다.

"선생 고집 때문에 나까지 납치범이 되고 말았단 말입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돈을 내놓겠다는 약속만 하시란 말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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