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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의 눈] 부산명물 국제영화제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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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초등학교 시절 각 지역의 특산물을 외웠다. 성환 참외, 나주 배, 영광 굴비, 안동 삼베 식이었다. 대구 섬유, 부산 신발, 대전 피혁 따위도 있었다. 그 시절 성환 혹은 나주가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는 몰라도 그 곳은 늘 참외.배와 한묶음으로 떠올랐다.

이미지가 형성된 것이다. 농.공산품만 아니다. 부산 하면 생각나는 것은 영도다리.자갈치시장.40계단 등이었다. 어른들의 유행가 가사를 같이 따라 흥얼거리며 그것들이 내 마음의 부산을 상징화했다.

지금 나에게 부산을 상징하는 것은 단연 부산국제영화제다. 여름철 노량진극장 건물벽 곁에 서서, 에어컨이 없어 열어놓은 출입구의 틈새로 보이는 스크린에도 가슴설레던 나에게, 그 때 부산영화제 같은 게 있었다면 정학 쯤은 아랑곳하지 않고 달려갔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제 10월의 부산은 영화를 좋아하는 젊은이들의 귀성지(歸省地)가 됐다.

직장인 중 극성스러운 사람들은 휴가를 아예 영화제 기간에 맞출 정도다. 과거엔 돈이 없어 극장 벽을 타고 몰래 '스크린 속으로' 사라지는 아이들 중에 명감독이 나온다고 했다.

이젠 남포동 거리를 메운 10여만명의 젊은 인파 속에서 미래의 명감독.명영화인이 탄생할 것이다. 문화적 재산의 다과(多寡)가 개인이든 나라든 삶의 질을 좌우한다는 건 사실 요즘의 명제만은 아니다.

문화가 귀족적.과시적.골동적 폐쇄공간에 머물면 그것은 고인 물처럼 죽은 문화가 된다. 문화란 모든 사람이 향유할 수 있어야 하며 그런 의미에서 이름붙인 '문화민주주의' 혹은 '문화대중주의' 는커녕 정치.경제의 민주주의마저 요원하던 시절에 그같은 명제는 다만 희망사항이었다.

소설가 박완서씨는 어릴 적 읽을거리에 목말라 방 벽을 바른 신문의 활자를 광고까지 몇 번이고 읽었다고 했다. 어떤 신문지는 거꾸로 붙여져 있어 그것을 바로 읽는 재미가 또한 각별하더라고 했다.

소설가 김성동씨는 집에 전기가 안들어오던 시절 읽던 책을 들고 읍내로 나가 외등 아래서 밤새 읽었다고 했다.

가난한 풍경이지만 그것이 그들의 소설적 모태가 되고 소설적 분심(憤心)을 일깨웠다. 영화에 관한 한 우리의 장차 명영화인들의 환경은 박완서의 가난한 풍경에서 멀리 벗어나 있지 않았다.

그들은 표현의 자유가 위축된 가운데서 만들어진 우리 영화를 보아왔다. 여기서 표현의 자유는 성적(性的) 소재나 폭력 묘사의 무제한적 자유를 뜻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사실 표현의 정도와 상영공간을 제한해야 한다.

지금 문제는 정치경제적으로 좀더 개방된 표현의 자유요, 그것의 활용이다. 그러나 영화계는 아직 냉전시대와 발전지상주의시대에 설정한 수많은 금기들을 넘어서려는 좌파적 관점의 영화를 만들 생각을 하지 않고 있다.

우리 영화가 섹스나 폭력 또는 연애 이야기에만 매달리면 말초적 소비상품이 우리의 이른바 영상의 세기를 지배하는 철학 부재(不在)의 풍토를 조성할 가능성이 크다. 섹스나 폭력에 빗대 그런 좌파적 관점을 표현하려는 것들도 있었지만 해석의 깊이가 유치해 보이는 건 결국 날 것의 섹스와 폭력뿐이었다.

우리 미래의 명영화인들은 또한 미국영화 위주의 강제된 편식증에 시달려왔다. 그것은 규격화된 상업주의가 강요한 희생이었다.

다양한 환경에서 나름대로 삶의 형태를 꾸려가는 사람들을 다룬 각국의 영화들을 접할 때 우리는 영화라는 통로로 세계인으로서의 보편적 관점을 얻을 수 있다.

극장영업이 자선사업이 아닌 한 장사가 안되는 영화를 틀어달랄 수는 없는 노릇이고 그런 점에서 영화제는 영화를 통해 세계를 보는 소중한 창이 된다.

한국의 지역문화행사로는 보기 드물게 불과 창설 4년만에 아시아권의 대표적 영화제로 부상한 부산영화제의 존재 의의는 참으로 크다.

이와 더불어 올해 3회째를 치른 부천판타스틱영화제도 해를 거듭하며 발전해 영화 꿈나무들의 미래에 자양분을 제공하고 있다.

부산영화제가 더욱 번창하기를 기원하며 비디오 칼럼니스트 옥선희씨의 부산영화제 즐기기 요령을 소개한다.

▶체력을 보강하자. 하루 서너편의 영화를 정신차리고 보려면 숙면을 취해둬야 한다. 반드시 끼니를 챙기고 비타민도 먹자. ▶욕심부리지 말자. 하루 네편 이상 보면 그 다음날 정신을 못차린다. 프로그램 책자에 감상문을 적고 동호인들과 토론을 즐기자. ▶자료와 소식지를 활용하자. 프레스센터나 호텔 게스트룸에 들르면 각종 자료와 정보를 챙길 수 있다. 소식지에는 감독의 기자회견 등 전날 소식과 당일 행사 일정이 꼼꼼하게 적혀 있다. 감독과의 대화시간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해 궁금한 것을 질문하자.

이헌익 문화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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