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542. 아라리난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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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제12장 새로운 행상 (20)

속으로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도록 놀랐으나 겉으로는 전혀 동요를 보이지 않고 가파른 시선으로 노려보았다. 그가 조선족이란 본색을 밝힌 까닭이 어디에 있든 이 불한당들과 한통속인 것만은 틀림없었기에 실토정을 했다 해서 화들짝 엎드려 목숨을 구걸하기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어디에 처박혀 있었는지 감감하기만 했던 자존심이란 응어리가 하필이면, 이런 환난을 겪고 있는 찰나에 불쑥 고개를 내밀다니. 우스꽝스럽다는 생각이 스쳐갔다.

그러나 그의 실토정이 태호로 하여금 조금이나마 여유를 갖고 사태와 대처하게 만든 것은 사실이었다.

"선생은 웃고 있습네다만, 지금은 사태가 간단하지 않습네다. 손달근이란 사람을 비밀리에 한국으로 보낸 것을 선생의 실책이란 말입니다. 옌지를 떠나기 전에 빌려 쓴 돈을 정산하기로 했던 약속을 쪼개 버렸기 때문이디요. 손달근이를 한국으로 돌려보낸 것은 두 사람이 짜고 저지른 사기극으로 믿는단 말입니다. 그런데 애, 노름판에서 빌린 판돈이든 사업자금으로 빌린 자금이든 이 사람들은 차별을 두지 않는단 말입니다. 어떤 난관이 닥치더라도 반드시 받아내고야말 것이란 말입니다. "

"댁은 조선족이라면서 비겁하게 이 패거리들의 하수인 노릇이나 하고 있는 거요?"

"여기서 내막을 털어놓을 수는 없습네다만 나도 살림이 딸리고 가정생활이 바쁘다 보니 어떻게 하겠습니까. 나도 이 사람들에게 부채를 진 형편이란 말입니다. 내 처지를 대강 짐작하겠디요? 한국비자를 받아 보겠다고 수시로 빌려 쓴 돈 때문에 이런 망신이란 말입니다. 한국땅은 냄새도 맡아 보지 못하고 감당도 못할 부채만 안게 되었단 말입니다. "

"누구에게 사기라도 당했다는 것입니까?"

"돈은 한족들에게 빌리고 서울에 있는 동족들은 돈만 삼키고 초청장 아이 보냅디다. "

"손씨가 이들에게 돈을 빌리고 차용증서를 쓸 때, 댁이 보증을 서 주었거나 입체(立替)라도 서주었더란 말입니까?"

"나도 배고픈 고생 참지 못하고 있는 형편에 입체를 섰겠습니까. 이 차용증서는 나도 처음 본단 말입니다. 그런데 애, 차용증서 어디를 살펴봐도 하자를 찾아 볼 수 없잖습니까. 이 사람들은 마누라를 팔아 넘겨도 서류 한 장 작성한 일이 없는 신용사회를 살아 왔단 말입니다. 오랜 옛날부터 안면만 믿고 살아 왔기 때문에 말로 한 약속이라도 의심을 두는 법이 없단 말입니다. 차용증서를 받은 것은 손달근이가 외국인이기 때문이었겠디요. "

"당신도 끌려나온 처지라는 것은 알겠으나, 이런 차용증서 써 주었다는 것을 나도 처음 발견한 것일 뿐더러 연대보증을 한 것도 아닌데, 동업자의 입장이라 해서 무턱대고 대신 정산해 줄 수도 없는 일이잖습니까. 또 그만한 현금 가진 것이 있다면 생각을 바꿔 볼 수도 있겠지만, 당신네들이 내 부랄 밑까지 뒤져서 찾아낸 현금이라 해 보았자, 불과 오십 위안뿐이었잖습니까? 당장 가진 것이 없는데, 손가락 잘라서 정산하란 얘깁니까?"

"그동안 러시아로 드나들면서 벌어들인 이익금이나 장사 밑천이 아이 많습니까?"

"돈을 지니고 있기가 불안해서 손씨편에 모두 부쳐 버렸어요. 거짓말이 아닙니다.

"오십 위안밖에는 다른 사람에게 맡겨 둔 돈도 없단 말입네까?"

"여기서 앉은 채로 맞아 죽을 각오하고 솔직히 말하라면, 그게 사실입니다. "

난감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던 조선족 사내는, 두 사람에서 눈을 떼지 않았던 사내들과 몇 마디 주고받은 뒤 다시 태호에게 다가왔다.

"선생의 말을 아이 믿습니다. 상거래를 계속하려고 남아 있는 선생의 주머니에 불과 오십 위안만 지니고 있다는 것도 개수작이란 것이고, 지금까지 돈 많이 벌어서 손달근이 편에 몽땅 들려보낸 것은 두 사람이 계획적으로 저지른 사기극이 분명하단 말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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