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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535. 아라리난장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2면

제12장 새로운 행상 ⑬

무작정 고흥을 떠나올 적에는 한철규 곁을 떠나간다는 사실이 군더더기 없이 홀가분했었고, 그런 단호함과 결단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스스로가 대견스러웠다. 그리고 태호와 같이 할 모험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에 줄곧 흥분했었다.

그러나 포시에트를 다녀온 이후 그녀는 스스로의 행동 하나하나에 신념을 가질 수 없었다. 꼭히 생명의 위협을 느낀 것에만 있지는 않았다. 따지고 보면 자신에게 품고 있는 의구심은 단순한 것이었다. 그녀는 이런 모험을 겪고 난 뒤편에 웅크리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그려보았다.

그러나 그때 보여줄 실체가 명징한 모습으로 떠오르지 않았다. 추스르고 가다듬어도 아지랑이 속처럼 아른아른할 뿐이었다. 무엇을 위해 자신이 살고 있는 것인지 그것을 찾아낼 수 없었다.

한철규를 떠나는 그 순간부터 꿈을 잃어버리고 말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태호가 분수에 넘치는 모험에 단근질을 당하고 있는 것은 뚜렷한 목표가 있기 때문이었다. 돈을 벌어야 한다는 일념이 있었고, 동행한 그녀와의 가정을 일군다는 꿈도 있었다.

그러나 자신에겐 아무런 명분도 없었다. 시행착오라는 것을 깨달았다면, 자신은 냉큼 한철규에게로 돌아가야 했다. 생각이 거기에 이르렀을 때,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에게로 냉큼 돌아갈 수도 없었다.

손씨의 채근으로 민박집으로 돌아가 걱정 속에 시간을 보내면서도 승희의 머릿속에는 온통 그런 상념으로 차 있었다.

태호와 그녀가 돌아온 것은 그날 밤 자정쯤이었다. 두 사람은 대담하게도 한밤중에 안내인의 도움을 받아 잠행로를 더듬어 중국땅으로 넘어온 것이었다.

흥분이 가라앉지 않은 탓도 있었겠지만, 전등 불빛 아래로 바라보이는 태호의 눈빛에서 섬뜩한 긴장과 광기 같은 것을 느꼈다.

고분고분하고 원만했었던 지난날의 태호는 이미 그의 외양에선 사라지고 없었다. 그를 험담했던 손씨까지 덩달아 흥분되어 있었지만, 태호는 손씨를 상대로 한창 무용담을 늘어놓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눈빛에 서린 광기를 느낀 순간, 승희는 그와 시선조차 마주칠까 두려웠다. 어느날 문득 늙음의 징표가 잠식해서 뚜렷하게 자리잡아 버리는 것처럼 사람의 심성이 변하는 것도 순식간이란 생각이 들었다.

승희는 혼란을 느꼈다. 여기서도 떠나야 할 것인가, 아니면 좀 더 두고 기다려야 할 것인가.

그때 단호한 태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난번에 사 갔던 사향 중에 가짜가 섞여 있었다는 말은 했습니다. 하지만 변상하라고 대들진 않았어요. 자기도 몰랐던 일을 추궁하고 들면 변상을 받아내기는커녕 현장에서 식별해 내지 못했던 내 무식만 노출시키는 꼴이 아니겠습니까. 밀매시장에서 멱살 잡고 야단법석을 피워 봐야 돌아올 것은 밀입국한 신분만 드러날 뿐이겠죠. 다만 그런 속쓰린 약점을 약용해서 상습적으로 사기 치려 들면, 쥐도 새도 모르게 가는 수가 있다는 것을 알아듣게 얘기했습니다. 그놈도 나하고 거래는 놓치고 싶지 않았던지 백배사죄하더군요. "

"보통 배짱이 아니네. 월경한 주제에 거기가 어디라고 냅다 공갈을 쳐?" "나를 조선족 행상으로만 알았지 남한에서 온 사람이란 것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양쪽 해관이나 갱들에게 뜯기는 뇌물에 배알이 틀려 배짱 좋게 잠행 루트를 타고 드나드는 줄로만 알고 있더라니까요. 승욱씨까지 곁에서 지키고 있으니까 의심의 여지가 없는 거예요. "

"정말 족제비 개구멍 드나들 듯해도 뒤탈이 없을까?"

"해관으로 드나든다 해서 봉변당하지 않는다는 보장은 있습니까? 가짜 여권이란 것이 들통나서 간첩 혐의를 뒤집어씌워 어디로 끌고가면, 난 그런데 못 간다고 응석이라도 피울까요□ 협상해서 뒷구멍으로 빠져나온다 할지라도 그때 난 완전히 알몸뚱이만 남겠죠. "

"거 생각하기도 소름끼치는 알몸이란 얘긴 꺼내지도 마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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